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턱에 손을 괴고 앉은 자세는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멜랑꼴리의 상태를 상징해왔던 자세다. 멜랑꼴리란 우울질 체질의 특징이다. “철학과 시, 그리고 예술에 특출한 사람은 모두 멜랑꼴리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필자는 괴팍한 성격에 기구한 삶을 선택한 소위 ‘천재’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었다. ‘천재’라고 불리는 예술가들은 분명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커다란 슬픔을 안고 태어나며 그것을 내면에 품고 산다는 점이다.
내면의 슬픔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면화 된다. 폭력이 되기도 하고, 광기가 되기도 하고, 불같은 열정과 창조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타고난 슬픔을 이성적으로 억누르고자 하면 병이 되기도 한다. 영문학 사상 최고의 로맨스 시인으로 손꼽히는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은 젊은 시절을 내내 병상에서 누워 지냈던 사람이다. 그는 억압적인 편부 슬하에서 자라면서 본연의 슬픔을 표출시킬 통로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그에게 돌아오는 건 언제나 엄한 훈육과 금기의 말들뿐이었다. 열다섯 살 때 엘리자베스는 조랑말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쳤다. 다행히 회복되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스무 해 넘게 병치레를 했다. 의사들은 이 특이한 병의 원인을 해명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앓아 누워있는 동안 많은 책을 읽었고 시를 썼다. 그리고 마흔 살에 마침내 자신의 시에 푹 빠진 남자, 로버트 브라우닝을 알게 되었다. 만일 로버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엘리자베스는 평생을 침실에서 누워 지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남자는 엘리자베스의 모든 것을, 슬픔마저도 진정으로 사랑했다. 엘리자베스는 아픔과 고통의 세월을 오직 로버트를 만나기 위한 시절로 생각하며, 이런 시를 썼다. “그대를 사랑해요. 옛 슬픔에 쏟아 부었던 열정으로” 자신의 오래된 슬픔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리고는 해피 엔드이다. 엘리자베스는 등산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다.
인간은 오직 타인의 사랑 안에서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대답을 생각하는 동안 프랑스 리얼리즘의 대가 쿠르베가 그린 초상화 ‘아름다운 아일랜드 소녀’를 소개한다. 그림 속의 소녀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와 대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연인의 손길을 떠올리고 있으며, 거울을 통해 연인이 바라볼 자신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거울에는 타인의 시선이 숨겨져 있고, 긴 머리카락에는 타인의 손길이 묻어있다. 사랑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이라는 필터를 끼고 사랑이라는 뷰파인더로 세상을 본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만 존재하려 한다.
하지만 사랑이 인간을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근본적으로 회복시켜 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슬픔은 인간 이전부터 이미 존재해 온 것 같은, 사랑보다 훨씬 오래되고 끈질긴 어떤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슬픔을 잠시 잊게 해주는 진통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슬픔을 직접 대면할 수는 없을까.
멕시코 화가인 칼로가 대답을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쿠르베가 그린 여인의 긴 머리카락과는 대조적으로 칼로는 ‘짧은 머리의 자화상’을 그렸다. 마치 광기어린 가학적 행위를 당한 듯 머리카락은 바닥에 산산이 흩어져 아직까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린다. 멜로드라마에서 긴 머리를 자르는 장면은 관계의 단절을 암묵적으로 말해주듯, 그림에서도 이렇게 잘려나간 짧은 머리카락은 결별 또는 독립을 말해준다. 그림 위쪽으로는 당시 멕시코에서 유행한 가요의 가사 일부가 씌어 있다. “보세요.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면, 그건 당신의 머리칼 때문이죠. 지금 당신은 대머리가 되었어요.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림 아래쪽에 펼쳐진 심각한 장면과 이 농담 같은 가사는 어울리지 않는 듯 차라리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프리다 칼로는 18세부터 이미 삶에 고통의 그늘이 드리워진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칼로가 타고 있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게 된다. 그 날 사고는 단순히 척추가 부러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쇠로 된 긴 봉이 떨어져 나가면서 그의 몸을 수직으로 관통하고 말았던 것이다. 평생을 석고 지지대를 입고 장애인으로 살면서 칼로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토해내듯 그렸다. 그러던 중 당시 멕시코에서 최고로 명성을 얻은 화가인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그는 칼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주고 예술가로서 인정해주었다. 며칠 밤을 새워 벽화 작업을 하는 지칠 줄 모르는 리베라를 보면서 칼로는 건강한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상상했고,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리베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리베라에게 점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을 결심한다. ‘짧은 머리의 자화상’은 바로 그 결심 후에 그린 것이다. 사랑에 의존하여 자신의 고통스런 현실을 잊고 지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칼로는 의존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슬픔을 싸안고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슬픔은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분노나 좌절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언제나 다른 것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리고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카락처럼 조금씩 자라난다. 잘라내도 또 자라난다.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이라는 소설 제목이 생각난다. 우리말로는 마치 ‘슬픔아, 잘 있어’처럼 들리지만, 원어를 보면 ‘잘 있었어?’라는 뉘앙스에 가깝다. 이 책을 쓸 무렵 18세에 불과했던 어린 저자는 이미 슬픔을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지 터득하고 있다. 자신 안에 있는 슬픔을 부정하지 않고 맞이하는 것이다. 슬픔은 떼버릴 수 없는 생의 그림자임을,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준 소설이다.
인생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늘 찾아오는 그 슬픔일 뿐이다. 슬픔, 또 너로구나. 반갑다.
/myjoolee@yahoo.co.kr
■사진설명=귀스타브 쿠르베, '아름다운 아일랜드 소녀', 1865-6, 캔버스에 유채, 54x65㎝, 스톡홀름 국립미술관(위쪽 작품). 프리다 칼로, '짧은 머리의 자화상', 1940, 캔버스에 유화, 40x27㎝, 뉴욕 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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