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시론] 코끼리의 10년전 악몽/최성환 대한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김한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10.15 17:34

수정 2014.11.05 11:13



태국에서는 가끔 코끼리가 사람을 밟아 죽이는 사고가 발생한다. 우발적인 사고가 대부분이겠지만 일부 동물학자는 코끼리가 자신에게 해코지한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가 앙갚음한 경우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코끼리는 수년 전에 당한 일도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기억력이 비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프린스턴대의 앨런 블라인더 교수는 미국의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부의장으로 근무할 때인 1990년대 중반 금융시장의 행태를 다음과 같이 동물들에 비유했다. “금융시장은 가젤의 민감함과 치타의 재빠름과 코끼리의 기억력을 갖고 있다(financial markets have the sensitivity of a gazelle, the speed of a cheetah, and the memory of an elephant).” 금융시장이 위험에 대해 매우 민감할 뿐 아니라 위험이 감지될 경우 재빨리 달아나고 또 위험의 원인을 오랫동안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코끼리의 비상한 기억력이 우리나라 외환시장을 위기국면으로 몰아가고 있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달러당 930원대였던 환율이 3월 들어 1000원을 넘어설 때까지만 해도 10년 만에 처음으로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데 따른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8월 중순 ‘9월 위기설’이 흘러나오면서부터 환율이 오름세를 타기 시작하더니 9월 초에는 달러당 1100원대를 넘어섰다.


게다가 9월 말 미국발 금융위기가 가세하자 환율이 수직상승하기 시작해 10월 초에는 장중 한때 달러당 1500원대를 넘보기도 했다. 지난 10일에는 하루 변동폭이 무려 235원에 달하는 등 극심한 변동성으로만 봐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이후 외환당국의 강력한 개입으로 환율이 급락세로 반전한 데 이어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의 구제금융 공조로 인해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대내외 환경이 급변할 경우 언제 다시 급등세로 돌아설지 모르는 휴화산이라고 할 수 있다.

2400억달러에 달하는 세계 6위의 외환보유액을 지닌 나라에서 달러 부족 사태로 환율이 치솟고 있는 것이다. 경상수지와 자본수지의 동반적자로 기본적으로 달러가 부족하기는 해도 최근의 환율 급등은 달러 부족 그 자체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면이 더 많다. 무엇보다 외환보유액에 대한 의심과 외환당국의 미덥지 않은 대응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나서서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지만 ‘백약이 무효’라고 할 정도로 먹혀들지 않고 있다.

실제로 정부와 국회가 쏟아내는 말마다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은행들이 외화자산을 팔아야 한다고 정부가 주문하면 그만큼 은행들이 달러가 없는 것으로 해석하고, 달러 모으기에 나서자고 하면 외환위기 때의 금 모으기만큼이나 사태가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식이다. 말이 앞선다는 비판도 바로 불신 때문일 것이다.

특히 외환당국이 외환보유액을 끌어안고 요즘과 같은 비상시에도 찔끔찔끔 사용하거나 말로만 때우려는 것을 보고는 외환보유액이 허수(虛數)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이처럼 불신이 도를 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국내외 투자자는 물론 일반 국민도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 외환보유액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300억달러라던 외환보유액이 막상 보따리를 풀어 보니 당장에 쓸 수 있는 달러는 100억달러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FRB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지난해 내놓은 회고록에서 외환위기 시 한국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속여 왔다는 점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표현했다. 필자 또한 외환위기 당시 한국은행 워싱턴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미국 재무부와 FRB 간부들의 당혹함을 넘어 ‘괘씸죄’를 온 몸으로 받은 경험을 갖고 있다.


신뢰가 없는 정책은 캄캄한 밤에 혼자서 손짓과 발짓을 보내는 것과 같다. 신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것도 보다 투명하고 명확한 통계와 행동으로 보여줘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 국민들은 ‘NATO(No Actions, Talks Only)’ 정부가 아니라 ‘MALT(More Actions, Less Talks)’ 정부를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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