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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깔모자와 황금날개] <3> 튤립이 피기 전에 ③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10.21 19:57

수정 2014.11.05 10:51

■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나한테도 KDS그룹 창업주 같은 돈 잘 버는 유전자가 있을까?)

그는 픽 웃었다. 그런 피가 튀었다면 벌써 이재본색을 드러내서 지금 같은 결핍을 느끼지 않았을 터였다. 어머니가 살아 있던 여덟 살 때까지를 제외하면 나이 서른에 이르는 지금까지 그는 늘 쪼들렸다. 어쩌다 돈이 생기면 아무 계획이 없이 써 버렸고, 돈이 생길 때까지 아프리카 부시맨처럼 굶거나 견뎠다. 그러고는 남들보다 한 걸음 일찍 자책하고 한탄하면서 자살 사이트에 접속하여 푸념을 하곤 했다.


모퉁이를 몇 번 돌고 횡단보도를 건너자 오래된 빌딩의 한 귀퉁이에 은행이 보였다. 은행의 자동 출입문을 향해 그는 지친 걸음으로 다가갔다.

(우선 사채를 갚고 다른 문제를 좀 더 곰곰 생각해 봐야겠어.)

창구로 가서 예금통장의 첫 페이지를 펼친 그는 입금된 숫자를 보며 조심스럽게 자릿수를 짚어 나갔다. 천만에서 억으로 넘어가고도 왼쪽에 숫자가 하나 더 있었다. 10억? 그는 마비된 듯 서서 한참 동안 통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체를 했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은행에서 나온 영철이 다시 거리에 섰을 때 해가 살짝 기울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로 부서지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그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몇 초 동안 멈춰 있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후 5시, 명동성당에서. 그렇게 번개를 날렸다. 친구들이 소식을 퍼 나르면 카페와 휴대전화에 억측이 난무할 것이었다. 앞을 다퉈 세상을 비관하는 채팅 친구들이지만 살다 보면 하루쯤 이런 행복한 메시지를 전해 들을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루하루를 죽음의 짙은 그늘을 덮고 살아가는 그들과 모처럼 밝은 얘기를 하게 돼 머리가 개운했다. 게다가 사채를 갚고도 수중에 8억원이 넘는 돈이 있었다.

(그래 난 부자다.)

나이 서른에 현금 8억을 갖는 경험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뭔지 뚜렷하지 않아도 그 돈의 의미가 찜찜했다. 마치 훔치지 말아야 할 집을 턴 것처럼 뒤가 무겁게 켕겼다.

청계천로를 따라 걷던 영철은 명동입구역을 향해 머리를 틀었다. 어머니의 비망록에서 읽은 명동길에 대한 감상이 생각나서였다.

(그 어디쯤에서 혹… ‘그분’을 볼 수 있을까.)

어머니의 글은 절제된 그리움이었다. 명동 거리의 인파와 앞서가는 패션 부티크들을 애써 아무런 감정의 치우침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쯤 전의 글이었는데, 아무것도 희망하거나 기대하지 않았고 절망하거나 화내지도 않았다. 옛날을 돌아보며 그리움을 삭이는 듯했다. 뭔가 애틋한 감상이 있을 법도 했지만 그저 명동길의 풍경이 있는 그대로 씌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언급한 ‘25시 레코드’ 가게를 찾아봤으나 자취가 묘연했다. 그 어름의 레스토랑에서 어머니는 혼자 ‘비후까스’로 점심을 먹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보았다는 꼭지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문 화가와 시인들의 풍경은 이제 바뀌어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서둘러 가는 노숙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시야에 찼다.

(혹시 저 사람? 불길한 예감이 늘 적중하는 것은 왜일까.)

남자의 서두는 모습이 어디서 본 듯했다. 채팅으로 이 사람 저 사람의 정보를 알고 있어 나타나는 기시감일 터였다. 명동성당에서 필립이 죽는단다! 번개가 그렇게 전달됐다면 이 느낌은 틀림없을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명동성당이 보이는 완만한 오르막길에 이르자 남자가 버티고 서서 빤히 건너다보았다. 영철은 아, 하고 탄식했다.

애써 남자를 피해 계단을 올라섰으나 끝내 멈춰 서고 말았다.
어느 사이 뒤쫓아 온 남자가 씻은 지 언제인지 모르게 땟국이 반들거리는 손을 내밀었다.

“필립씨? 반가워요. 난 남경준. 카페에서는 오시리스라고 했지요. 괜찮다면 어디 좀 앉아 잠시만 얘기를 나눠요.”

대머리인 그는 턱이 뾰족하게 세모진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어딘지 심술궂고 파렴치할 것 같이 치켜 올라간 작은 눈을 찡그리며 속삭였을 때 숨이 막히게 입냄새가 났다.

“오늘 혹시 그거 하려는 거라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고 해요.”

“뭐 억울한 일이라도 있나요. 한 놈 손봐 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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