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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깔모자와 황금날개] <23> 죽은 자들로부터 오는 신호 ①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11.18 16:43

수정 2008.11.18 16:43



■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자리를 잡고 앉자 아까의 바텐더가 양주 J&B와 마른안주 그리고 유리잔을 내왔다. 노이만이 주문을 해 놓았던 모양이다. 테이블 가운데 놓인 마른안주 접시에서 아몬드를 집어 ‘오드득’ 소리가 나게 힘주어 씹었다.

이 사람을 버려야 하나, 계속 함께 가나? 삶의 매 순간이 선택이라지만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영철은 난감했다. 물론 밝히고 싶지 않은 동성애자로서의 성적 취향을 밝힌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부끄러운 비밀을 함께 간직함으로써 의리가 돈독해지는 경우도 흔했다. 결국 그는 충성(혹은 의리)을 바치겠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었다.

노이만이 바텐더를 불러 물었다.

“마스터 님은 언제 나오시나요?”

“오실 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 손님.”

시계를 들여다보며 테이블 맞은편으로 걸어간 바텐더가 허리를 굽히더니 노란 수납상자를 꺼내 놓았다. 그러고는 상자를 열어 가면들을 늘어놓았다.

그 순간 등 뒤가 부산해졌다. 옅은 향수 냄새가 나서 돌아보자 조향미와 친구가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두 사람은 좀 전까지 영철이 탐색했던 꼭 그 모습의 홍대 앞의 여자들이었다. 말을 붙이기 부담스럽게 늘씬하고 트렌디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회색 탑 코트와 유난히 길어 보이는 검은색 레깅스 바지 차림인 것이 마치 이 파티를 위해 준비한 것 같았다. 조향미가 짧은 체크무늬 덧치마를 입었고, 함께 온 친구는 카브라 핫팬츠를 입은 정도만 차이가 있을 뿐 둘의 체형이나 옷걸이가 쌍둥이처럼 닮아 보였다.

인사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을 찬찬히 훑어본 노이만이 영철의 팔을 붙잡아 한쪽으로 불러냈다.

“도우미들을 부른 거야? 너무 이쁘잖아.”

목소리가 컸을까. 조향미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조향밉니다. 그리고 저 도우미, 아니거든요!”

“전 김순정이라고 해요.”

숨기려고 애썼지만 김순정의 말투에 연변 동포의 억양이 묻어났다. 노이만은 그것도 탐탁지 않은지 다시 툴툴거렸다.

“김순정 언니야, 이름이 옛날스럽네예.”

자리가 서먹하다는 생각을 했는지 배민서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름에서 니은자 하나 빼 뿌소. 김수정, 안 괘않겠습미꺼?”

“일 없습네다!”

김순정의 볼이 발그레 상기됐다. 약간 보글보글하게 파마를 해서 그런지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게 복스러웠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가면입니다.”

순정을 위해 준비한 듯이 그 순간 바텐더가 가면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모두 가면을 쓰고 술을 받았다.

“오늘 밤은 노이만 선배님을 위한 밤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다시는 오늘 같은 내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과 무궁한 돈벌이를 위해 다 같이, 자 건배!”

모두 짤막하게 소리쳤다. 술잔이 어수선하게 비워지는 사이 그들 앞에 무지개 줄무늬가 그려진 몸에 꼭 끼는 니트 셔츠를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얼굴에 나비 가면을 쓴 타로카드 마스터였다. 귀가 당겨질 정도로 커다란 귀고리를 단 그녀가 테이블의 손님들을 그윽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바텐더가 수납상자에서 푸른 융단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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