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지 심수구의 바람풍경전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12.15 09:12

수정 2008.12.15 09:12


■심수구의 ‘바람경치展’

서양화가 심수구(59)는 현대 문명에 저항하는 사람이다. 기계와 디지털 문명이 몰고온 빠름과 편리함을 뒤로하고 느리고 자연의 냄새가 나는 아날로그 문명을 지향한다. 한때 목판화와 페인팅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지만, 왠지 자연과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그는 캔버스와 물감을 팽개쳐 버렸다.

대신에 그는 하잘것없이 땅에 굴러 다니는 작은 나무토막들이나 불쏘시개로 쓰이는 나뭇가지를 잘라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싸리나무 회화’다.
느리고 무겁게 느껴지는 작업임에도 우리 마음의 고향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컬렉터들로부터 호평을 얻고 있다.

‘싸리나무 작가’ 심수구의 열두번째 개인전인 ‘바람경치展’이 오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창성동 갤러리 쿤스트독(02-722-8897)에서 열린다. 이번 개인전에는 싸리나무로 만든 대형 설치작품 4점과 소형 작품 6점 등 총 10점이 선보인다. 특히 액자를 대신한 책 모양에 풍경을 파노라마로 재현한 ‘책 시리즈’와 경남 창녕 우포늪을 보고 착안한 ‘우포늪 시리즈’가 처음으로 공개된다.

작가 심수구는 산과 들에 널려있는 싸리나무의 둥근 단면을 작업에 활용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과정은 단순하지 않고 매우 힘든 노동임을 알 수 있다. 먼저 버려진 싸리나무들을 작두로 일일이 3㎝ 크기로 잘라서 6개월 정도 잘 건조시킨다. 건조된 나무는 나무벌레 퇴치약품(포르말린)으로 처리한 후 쌀자루에 넣어 다시 수개월 동안 보관한다. 이렇게 완성된 재료들을 실내의 작업실로 옮겨와 그는 넓은 패널 위에 싸리나무를 붙여가며 입체작품을 제작한다. 나뭇가지를 하나하나 손으로 붙이고 일부는 촛불에 태우거나 물감을 입히며 붙인다.

처음엔 비록 하잘것 없는 나무토막들에 불과했지만 작가 심수구의 손을 거치면서 나뭇가지들은 큰 함성을 내지른다. 그 함성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전한다. 마치 보잘것 없는 것들이 모여서 삼라만상을 이루며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작가는 자연의 원리를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심수구의 작품은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하나의 나무토막에 불과하다. 하지만 멀리 떨어질수록 그 나무토막은 어떤 풍경으로 변하고 교향악단의 화음처럼 소리를 낸다. 자연이 들려주는 교향악인 셈이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추상화를 그리다 9년 전부터 싸리나무 작업을 시작했다. 우연히 시골의 처마 밑에 쌓아둔 장작더미를 보고 하나의 보잘것 없는 나무토막들이 수없이 많이 모였을 때 새롭고 큰 함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다. 사실 싸리나무는 초가집의 울타리로 사용되거나 마당을 쓸어주는 빗자루로 사용된 만큼 자신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 녹아 있었다.

심수구의 작품도 이 같은 싸리나무를 닮았다.
작품의 재료가 싸리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굵고 얇은 나뭇가지의 단면을 통해 그가 연출해낸 작품이 리듬감과 음영, 그리고 높낮이에 따른 입체감을 드러내지만 전체 속에 부분을 감추고 있어서다.

작가는 “보통 경치라면 땅에서 보이는 풍경을 말하지만 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경치는 바람의 경치이다.
잎사귀를 다 쓸어가버리고 남은 앙상한 가지의 풍경으로, 수많은 나뭇가지들은 서로가 중첩되면서 각각의 몸짓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싶은가. 세월의 무게를 느껴보고 싶은가. 바람이 스쳐가고 남은 앙상한 나뭇가지로 만든 싸리나무 작가 심수구의 작품을 보라.

/noja@fnnews.com노정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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