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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깔모자와 황금날개] <55> 텃밭에서 야채 따기 ④

노정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01.01 18:09

수정 2009.01.01 18:09



■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영철은 땀을 대충 닦아내고 탈의실로 가서 휴대폰을 꺼냈다. 마취라도 된 것처럼 온몸이 나른했다. 휴대폰 폴더를 열어 보다가 영철은 부재중 전화 메시지를 보았다. 오프라가 세 번이나 전화를 했었고 문자 메시지도 두 통이 와 있었다.

‘금사슬 목걸이에 왼 손목에 흉터가 있는 키 185.’

‘신랑이 날 미행했나 봐요. 대표님 사우나 간 걸 말해주고 말았어요.’

영철은 통화 키를 꾹 눌렀다.

“오프라 님? 신랑이 여기 사우나에 와 있다는 말입니까?”

탈의보조 벤치에 영철이 털썩 주저앉았다. 옷을 갈아입던 사람들이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난감했다.
손가락 마디가 헐거워진 것처럼 힘이 없었으나 순간 화가 치솟았다. 이럴 때 그가 덤비기라도 한다면 속수무책이었다.

“네. 죄송해요. 정말 별일 없는 거죠?”

“괜찮습니다. 집안 단속을 그렇게 해서 어떻게 큰일을 합니까?”

“그 사람 화가 나면 완전히 돌아버려요. 사람 패놓고도 기억이 하나도 안 난대요.”

김순정에게 전화를 해주고 욕실로 돌아온 영철은 통로를 어슬렁거렸다. 적외선 온돌 침상에 누워 비몽사몽 나른함에 취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잠들었다가 무슨 횡액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곤해진 몸이 천천히 회복될 때쯤 오프라의 신랑으로 보이는 금사슬이 지나쳐 갔다. 한증막에서 노려보던 그 사내였다. 몸이 웬만큼 식은 뒤 영철은 냉탕으로 뛰어들었다. 발끝에서부터 심장 깊은 곳까지 날카로운 냉기가 파고들었다. 어허! 영철은 참지 않고 큰 소리로 신음 소리를 토해내며 쾌감을 느꼈다.

몸을 충분히 식힌 다음 영철이 다시 한증막으로 들어갔다. 땀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 오프라의 신랑이 들어오더니 위압적으로 맨손체조를 했다. 영철이 참지 못하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 어쩌라고? 아니꼽심껴?”

영철이 바라보자 그가 중얼거렸다. 대꾸를 할까 말까. 순간 영철은 망설였다. 이런 때는 대개 충동적으로 싸움을 하고 후회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조향미씨 남편 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엠앤아이 이영철 대푭니다.”

영철은 목례를 하고 나서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다.

“잘못 보지 않았다면, 저한테 단단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껄렁하게 비쳐졌기를 바랐으나 벌거벗은 채로 바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금사슬 목걸이를 건 그가 껄렁해 보였다. 영철은 신경질적으로 모래시계를 집어들어 절도 있게 탁, 소리가 나게 거꾸로 세웠다.

“뭔지 모르지만 오해를 했을 것입니다. 아까 조향미씨 보니…. 많이 아팠을 것 같았습니다. 남편 분께서 그랬습니까?”

“얻다 대고 개똥철학이심껴…. 잠깐. 기둘려 봐!”

그가 문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스위스 나이프라도 빼들고 쫓아오지 않는지 걱정됐다.
하지만 그는 30초도 되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되돌아왔다. 그가 다가오자 찬바람이 일어났다.
냉탕의 위력이었다.

“그 친구 꿈을 꾸면서까지 당신, 필립씨를 부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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