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英서커스 오페라 ‘몽키 저니 투더 웨스트’ |
중국 출신의 오페라 연출가 진사정이 연출한 이 작품은 지난 2007년 6월 28일 영국 맨체스터 국제 페스티발에서 처음 공연됐으며 같은 해 9월 파리에서, 2008년 5월에는 미국 스폴레토 페스티발에서 공연되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7월 런던 로얄오페라하우스를 거쳐 2008년 11월 8일부터 런던 남동쪽 템즈강 근처에 마련된 텐트극장 ‘Monkey World’에서 지난 4일까지 연장 공연됐다.
이 공연은 여러모로 실험적인 성향이 강한 작품이다. 영상 예술인 애니메이션과 무대 예술의 접목,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서커스와 오페라의 만남, 중국 전통악기와 서양 악기의 조화 등등 언급하기에도 숨이 찰 지경이다. 어느 한 단어로 장르를 구분짓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이 공연엔 수많은 장르가 뒤엉켜 있다.
공연의 오프닝은 손오공이 알에서 깨어나는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애니메이션이 보여지던 커다란 스크린 막 뒤에 조명이 들어오면서 마치 만화 속에서 인물들이 튀어나와 연기하는 듯 자연스럽게 스크린에서 무대로 옮겨진다. 영국의 주목받는 카투니스트 제이미 휴렛이 만들어낸 생동감 넘치는 애니메이션은 만화적인 상상력을 무대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냈다.
영상과 무대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사용하는데 큰 역할을 한 샤막은 이 공연의 가장 중요한 무대장치 중 하나이다. 샤막이란 막 안쪽이 어두울 때 객석에서 보면 평범한 불투명 막 처럼 보이지만, 막 안쪽에 조명이 들어오면 막을 통해 무대 안쪽이 투명하게 보이는 특수한 무대장치다.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이나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는 장면 등 실제로 무대 위에서 보여주기 힘든 부분들을 영상으로 대체함으로써 무대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며 ‘서유기’의 스펙타클하면서도 상상력 넘치는 스토리를 잘 표현해냈다.
온갖 무술에 능한 원숭이와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다양한 요괴들과의 싸움을 주제로 하는 만큼 이 공연에서는 고급 플라잉 기술과 고난이도의 아크로바틱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공연의 3분의 1이 공중에서 펼쳐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배우들이 자유자재로 공중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친다.
중국 무협영화를 방불케 하는 공중 액션 장면이 펼쳐질 때마다 객석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크로바틱과 서커스 전문가들이 펼치는 아슬아슬한 묘기들과 아름다운 곡예 또한 이 작품의 아주 특별한 특징 중의 하나다. 극중 등장하는 거미요괴가 와이어 없이 천장에 고정된 두 가닥의 긴 천을 이용해 자유자재로 이동하며 묘기를 펼치는 장면은 마치 태양의 서커스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아름다운 명장면이었다. 이 뿐 아니라 중국 서커스 하면 떠오르는, 몸을 기이하게 접는 연체동물 묘기나 접시 돌리기, 인간 탑 쌓기 등 클래식한 서커스 묘기들도 볼 수 있다. 왜 이 공연을 ‘서커스 오페라’라고 부르는지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하다.
거대한 불상과 대나무 숲, 중국 전통 건물 등으로 가득 채워진 무대, 중국 배우들이 펼치는 중국 전통 무예와 서커스 묘기 등 동양문화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무대 바로 옆에는 오케스트라석이 자리잡고 있다. 피파, 고쟁 등 중국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는 서양인에게 생소한 중국 전통악기를 라이브로 연주하는 모습을 관객이 직접 볼 수 있도록 객석을 향해 오픈돼 있다.
동양적인 색체가 물씬 풍기는 ‘Monkey Journey to the West’의 음악은 놀랍게도 중국인이 아닌 영국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국인도 보통 영국인이 아니다. ‘브릿팝’의 선두주자였던 ‘블러(Blur)’라는 영국 밴드의 멤버였고 이 작품의 애니메이션을 담당했던 제이미 휴렛과 함께 가상 밴드 ‘고릴라즈’를 탄생시켰던 데이먼 알반이 이 작품의 음악을 만들었다. 지극히 영국적이고 현대적인 음악을 하던 사람이 지극히 동양적인 퓨전 음악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공연을 보는 내내 탄성이 끊이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신기한 볼거리들로 가득했던 ‘Monkey Journey to the West’. 그러나 이들 볼거리들의 매력이 너무 강했던 탓인지 공연이 끝난 후 정작 스토리나 등장인물들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요괴들과 싸우는 모든 장면이 명장면이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자신의 힘을 아무렇게나 이용하여 다른 이들을 위험 속에 몰아넣곤 했던 천방지축 원숭이가 약자를 돕고 악을 무찌르면서 정의를 알게 되고 철이 들어가는 과정은 ‘서유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교훈일텐데 화려한 액션 장면들에 가려져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것은 굉장히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런던=stonewall@naver.com김자형통신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