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21일 문을 연 서울 서초동 교보문고 강남점 ‘프리미엄 북스’. 이곳에는 193종, 4500만원어치의 희귀 도서가 모여 있다. 가장 앞에 진열된 ‘헬무트 뉴턴 사진집(SUMO)’은 1500만원이란 가격 덕분에 이미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사진=박하나기자 |
지난 1월 21일 문을 연 교보문고 서울 강남점 ‘프리미엄 북스’는 매장 내 9.9㎡ 남짓한 공간을 가리킨다. 국내외 희귀 도서를 모아놓은 곳이라 해서 고급 인테리어를 갖춘 별실을 상상하면 안 된다.
말굽 모양의 책장과 서너권의 책이 들어갈 만한 유리 진열대가 전부인 이곳엔 193종, 4500만원어치의 책이 있다. 권당 평균 가격을 계산하면 약 23만3000원 꼴이다.
사실 이 곳은 지난달 20일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탔다. 역대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SUMO(헬무트 뉴턴 사진집)’ 덕분이다. 무려 1500만원의 가격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그 무게만 30㎏, 딱 초등학교 어린이 몸무게다.
‘SUMO’에 관한 보도가 나간 뒤 호기심에 ’프리미엄 북스‘를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하지만 유리장 안에 얌전히 누워 있는 원본을 꺼내어 보는 손님은 드물다. 이 곳 책임자인 송미경 관장은 “대부분은 축약판을 보는 것으로 대리 만족을 하고 이제껏 딱 한 명만이 원본을 봤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가장 비싸다’는 이유로 모든 관심이 ‘SUMO’에 쏠려있지만 사실 효자는 따로 있다.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진작가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하늘에서 본 한국’은 이 곳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이다. 한 권에 9만7000원인 이 도서는 이제껏 20권이 팔렸다.
항공 사진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은 당초 ‘하늘에서 본 지구’(8만3000원)라는 책으로 스타가 됐다. ‘하늘에서 본 지구’는 그가 10년간 열기구를 타고 지구 곳곳의 비경을 찍어낸 사진집인데 개관 이후 3부가 판매됐다.
그렇다면 ‘귀하신’ 책들만 모인 이 곳에서 가장 저렴한 책은 무엇일까. 국내 도서로는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양장본 특별판)’가 3만5000원, 외국 도서로는 ‘당신이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1001개의 음반’이 3만680원으로 그나마 ‘팔릴 만한’ 가격표를 달고 있다.
송 관장은 “희귀 도서를 소장하고 싶어하는 고객들을 위해 마련한 코너인데 한정본 도서가 적어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면서 “워낙 고가의 책들이기에 판매 전략을 짜기도 쉽지 않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 교보 프리미엄 북스관 정현종 ‘시선’ |
■앤 게디스 사진집 '인기 많은 것도 죄'
인기가 너무 많아 온갖 수난을 당하는 책도 있다. 호주 출신의 아기 사진 작가 앤게디스의 사진집 'Autobiography'는 군데 군데 찢기고 구겨진 곳 투성이다.
이 책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귀여운 아기 사진이 가득하다. 남녀노소 누구라도 손에 쥐었다 하면 놓질 못한다.
문제는 2.5㎏쯤 되는 책의 무게다. 어지간한 노트북보다 무거운 책을 손에 들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떨어뜨리거나 실수로 찢는 일이 잦다. 이렇게 파손된 책은 팔 수도 없어 고스란히 서점의 몫이 된다.
'프리미엄 북스'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 2∼3㎏을 넘는다. 손에 들고 보기엔 부담스럽다. 때문에 매장 한 쪽에는 어린이 키만한 독서대와 손때가 탈 것을 염려해 마련한 면장갑이 준비돼 있다. 하지만 이를 이용하는 고객은 극히 소수다.
그렇다면 영광의 상처가 가득한 앤 게디스의 사진집은 개관 이후 얼마나 팔렸을까. 정답은 0부. 고생은 있는대로 하고 실속은 챙기지 못한 셈이다.
■같은 책도 명품관에 입성하면 3배 이상 '껑충'
똑같은 소설책도 이곳에 입성하기 위해선 몸값을 3배 이상 부풀려야 한다. 민음사가 올 초 세계문학전집 200권 간행을 기념해 선보인 '세계문학전집 특별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거미여인의 키스, 햄릿,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고도를 기다리며, 이반데니소비치-수용소의 하루, 변신-시골의사, 동물농장, 오만과 편견, 구운몽, 데미안 등 10권으로 구성된 특별판의 가격은 25만6000원. 만약 똑같은 작품을 동일한 출판사의 일반 도서로 구입한다고 가정하면 7만4000원이 든다.
무려 3.6배나 가격이 뛴 이유는 유달리 공들인 디자인 때문이다. 한 세트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저마다의 개성을 자랑하는 책들은 모두 이상봉, 안상수, 이돈태 등 유명 디자이너의 솜씨다.
■들어오는 식구, 나가는 식구
취재 당일 '프리미엄 북스'는 두 명의 새 식구를 맞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날의 주인공은 '정현종 시선'과 '흔적' 두 권의 시집이다. 각각 50만원으로 이 곳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그야말로 희귀 한정본이다.
'정현종 시선'은 2004년 네루다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정현종 시인의 자필 수제 시집이다. 2005년 100부 한정으로 제작됐으며 각 권마다 친필 작품 한 편이 포함돼 있다. 문화재 복원 수리 기능공 김권영씨가 전통 한지와 밀랍을 입힌 무명실로 꼼꼼하고 탄탄하게 만들어 언뜻 봐도 탐이 난다.
역시 100부 한정본인 '흔적'은 평론가 김화영 교수가 엄선한 현대시에 판화 작가 양주혜씨의 작품을 가미한 책이다.
이들은 곧 신간이 전시되는 왼쪽 끝 책장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이 자리의 주인 행세를 했던 '난중일기 영인본'과 '칼의 노래(특별판)'는 한 칸 아래로 물러났다.
위풍당당하게 이곳에 입성했다 쫓겨나는 책도 있다.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는 12만원이라는 결코 저렴하지 않은 가격 덕분에 명품 딱지를 달았지만 출판사에서 반값 세일을 하는 바람에 체면을 단단히 구겼다.
송 관장은 "희귀본은 그에 맞는 가격을 유지할 의무가 있는데 이렇게 염가로 판매해버리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고 퇴출 배경을 설명했다.
■비싸도 팔아내야 하는 고민
'프리미엄 북스' 개관 이후 2월까지의 성적표를 보면 판매액은 약 700만원, 권수로는 90여권이다. 비싸서 누가 살까 싶지만 판매가 아주 저조하진 않다.
구매 고객층은 미술 전공자나 사진작가, 대학 교수 등으로 폭이 좁다. 수십만원에 이르는 책 앞에서 선뜻 지갑을 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탓이다. 결국 다양한 잠재 고객을 발굴하고 소장 가치가 높은 책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이곳의 과제다.
'정현종 시선' '흔적'과 'SUMO'를 제외한 나머지 도서들은 다른 서점과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다는 것도 정체성에 부담을 준다.
송 관장은 "아무리 좋은 책이 출간되도 독자들이 알지 못하면 그대로 사장된다"면서 "묻혀진 도서를 발굴하고 진열해 소장 가치를 높이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wild@fnnews.com 박하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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