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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깔모자와 황금날개] <122> 독약을 삼키다 ②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04.08 16:40

수정 2009.04.08 16:40



■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회장 전용 차량인 에쿠스를 뒤쫓으며 필립이 물었다.

“회장님이 주변 정리를 하시는 겁니까? 회장님도 그렇고 직원들의 분위기가 어째….”

“잘 봤다. 일부러 그런 체하시는 거야. 적들을 안심시키려는 거야.”

“적들이라면?”

“KDS홀딩스 쪽 끄나풀들이 많이 있거든. 아마 니 존재도 안테나에 걸려 있을 걸. 골프장 회원권을 넘긴 것도 지금쯤 보고됐을 거다.”

덕수궁과 요양병원에서 지난 얘기를 들려줄 때 회한에 잠기던 안형모 회장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의 병색이 그런저런 섭섭함과 아쉬움의 표현이었던가 보았다. 대신제강의 직원들로서는 KDS그룹에 속하는 것을 반길 만했다. 재벌그룹 직원 신분도 신분이려니와 종업원들이 보유한 주식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종업원 지주제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직원들이 주식을 보유할 수 있게 유도했던 것이 결국은 부담이 되고 있었다.


안 회장이 탄 차는 남산 기슭의 T호텔로 들어섰다. 테니스장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고 인도어 골프장 그물망을 지나면서 필립은 또 하나를 배웠다고 생각했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배정받은 코트로 나가 안 회장을 보니 몸에 적당히 들어맞는 흰 운동복이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교도소 생활을 몇 년씩 하고서도 생의 제2막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꽃피운 사람다웠다. 잔기침을 하고 숨을 고르기는 했지만 스트레칭을 하는 작은 동작에도 힘이 들어 있었다.

뒤쪽에서 볼 보이를 자임하고 대기하는 총무팀장을 흘끔 봐 두고 안 회장이 말했다.

“살살 쳐 주게나.”

네트 앞에 마주선 필립 쪽으로 톡 하고 그가 공을 토스했다. 배드민턴 셔틀콕을 받듯이 필립이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라켓 면에 정확히 넘겼다. 그렇게 몇 번 공을 주고받다가 필립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고 안형모 회장이 어느 사이 안정된 폼을 찾았다.

토스를 하며 하프라인까지 물러났을 때부터 필립이 약하고 부드러운 스트로크로 공을 보냈다.

“자네 어머니와 KDS그룹 회장님이 여기서 테니스를 치고 데이트를 했다네.”

안 회장이 발리 자세를 취해 톡 커트하며 말했다. 필립은 듣고 싶지 않았다.

“헛. 듣고 싶지 않은 게로군. 너무 세게 치지 말게.”

흘린 공을 주워 들고 총무팀장이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안 회장은 20여분 동안을 그렇게 무엇인가 암시하는 이야기를 하며 몸을 풀었다.

“편을 짜서 게임을 한 번 해볼까? 자네와 내기를 해보고 싶네만.”

“전 딱히 걸 만한 게 없습니다.”

“지는 쪽이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지.”

총무팀장이 받아들이기를 재촉하는 뜻으로 눈웃음을 지었다. 그때 작달막한 키의 구릿빛 얼굴의 청년이 바볼랏 라켓을 들고 네트 쪽으로 다가왔다. 테니스코트에서 회원들을 지도하는 코치였다.

“회장님과 제가 한 편을 먹겠습니다.”

구력 10년의 총무팀장과 한창 나이의 필립이 한 팀을 이뤘으므로 정상적이라면 어울리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안형모 회장이 문제였다. 탈진을 하거나 갑작스러운 체력저하로 게임을 포기할 경우 기권승을 거둘 수 있지만 그것을 바라고 안 회장을 공략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날 쓰러뜨리거나 점수를 따거나 하게. 내가 하려는 부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네.”

한 세트의 경기 정도는 소화할 수 있는 체력이 된다는 듯 안 회장이 프린스 라켓 면을 손바닥에 탕탕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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