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두 도둑 이야기’로 뭉친 마임이스트 유흥영·고재경씨

박하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05.21 16:59

수정 2009.05.21 16:59



통 넓은 멜빵바지를 걸친 남자가 몸을 비비 꼰다. 용변이 급한 모양이다. 있지도 않은 문을 벌컥 열고 쭈그려 앉더니 이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아뿔싸. 휴지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슬그머니 양말을 벗는다. 쓱싹쓱싹. 엽기적인 결말에 관객들은 그만 자지러졌다.

에피소드는 1시간 20분 동안 이어진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러닝 타임 내내 배우의 입은 굳게 닫혀 있다.
극장을 채우는 것은 오직 관객의 웃음뿐. 이곳은 배우의 구두굽 소리조차 허용되지 않는 마임극의 무대다.

■한국마임계의 대표주자 ‘두 도둑 이야기’서 만나다

“마임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mimos(흉내)입니다. 연극은 대사와 마임, 발레 역시 무용과 마임으로 나뉘니 모든 장르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죠.”

25일 폐막하는 피지컬씨어터페스티벌 참가작 ‘두 도둑 이야기’의 원작자 유홍영씨(50)는 한국 마임계의 얼굴이다. 한국 마임협의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1985년 처음 이 작품을 발표한 뒤 1990년 독일 국제 마임 페스티벌 ‘가우클러 90’에 초청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유씨와 ‘두 도둑 이야기’에서 호흡을 맞춘 고재경씨(40)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마임이스트다. 일년에 2∼3차례 정기 공연을 올리는 동시에 새 작품을 한 편씩 만들어 온 그는 한국 마임협의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협의회라고 해봤자 회원은 고작 42명 정도예요. 지속적으로 작품을 선보이는 배우들은 더 적구요.”

세월이 흘러 ‘한국 마임계의 중견’이란 이름표까지 달게 된 고씨는 1987년 마임이스트로 첫발을 내디뎠다. 자신의 데뷔보다 2년이나 빨리 탄생한 ‘두 도둑 이야기’를 두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홍영씨와 콤비를 이룬 건 이 작품이 처음이에요. 마임의 모든 요소가 집약된 교과서 같은 작품이죠.”

■극대화된 교감, 설명할 수 없는 희열

서울 대학로와 지방 등지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며 내공을 쌓은 유씨에겐 잊지못할 추억이 있다.

“‘관객들과 내가 무언의 소통을 하구 있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어요. 그 순간에는 300∼400명이 몰려들죠. 그러다가 ‘아차!’ 실수라도 하면 또 썰물처럼 쫙 빠져나가요.”

한번은 옆에 있던 관객의 몸에 실을 꿴 뒤 끌어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관객은 줄에 묶인 인형처럼 몸을 움직였다. 흥미를 느낀 그는 비슷한 동작을 여러 명에게 했다. 무려 열 명의 관객은 그의 지휘에 따라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말로 시켰다면 그렇게 했을까요. 마임을 안다거나 저와 안면이 있는 분들도 아닌데 그때만큼은 뭔가 통한 거죠. 그게 바로 교감의 절정이고 희열이에요.”

마임이스트들은 전천후 아티스트다. 극도 쓰고 연출도 하고 배우 역할까지 해야 한다. 대사가 없으니 딱히 정해진 대본이 있을 리 없다. ‘두 도둑 이야기’처럼 두 배우가 호흡을 맞춰야 할 때엔 서로의 기억이 엇갈려 실수할 때도 종종 있다. 어쨌든 마임을 완성시키는 것은 관객이다. 웃거나 우는 등의 호응이 없으면 무대는 그야말로 무덤이 된다.

그들의 바람은 좀 더 많은 사람이 마임을 관람하는 것이다. 아쉬운 현실을 몇 번이나 곱씹던 고씨는 결국 질타의 화살을 자신에게 쏜다.


“여건이 열악하다며 불평을 참 많이 했죠. 하지만 저희들 스스로가 작품을 선보이지 않는데 대중들이 어떻게 마임을 보겠어요. 앞으로 꾸준히 신작을 소개하고 무대에 서는 횟수도 늘릴 거예요.”

다짐을 거듭하던 두 남자는 자정이 가까워오자 작은 배낭을 훌쩍 둘러메며 지친 몸을 추슬렀다. 24일부터 시작되는 춘천마임축제로 향하는 콤비의 발걸음은 무겁고도 가볍다.


/wild@fnnews.com 박하나기자

■사진설명=마임이스트 유홍영(왼쪽), 고재경씨가 마임 '두 도둑 이야기' 공연 중 '사랑에 빠진 타조 커플'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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