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막내가 바나나를 참 좋아했는데 비싸다고 자주 사먹이지 못했어요.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게 가장 가슴이 아파요. 아끼지 말고 사줄 걸….”
어머니 윤경순씨(52)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윤씨는 18년 전 아들 최민석씨(22)를 잃어버렸다. 6세 터울의 형과 ‘놀러 가겠다’고 나간 뒤였다. 집 근처 교회 마당에서 세발자전거를 타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평소 자기 물건을 끔찍하게 챙겼어요. 뒤늦게 아들을 찾아봤지만 세발자전거도 온데 간데 없더군요. 누가 데려갔다해도 자전거를 가져갔을 거예요.”
실종 당시 네 살이었던 민석씨는 대전에서 전남 광주시 임동으로 갓 이사온 탓에 집 전화번호나 주소를 외우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형과 아버지의 이름뿐.
“형 이름은 민호예요. 평소엔 형아야, 형아야 하다가도 성질을 부릴 때면 ‘민호야!’라고 소리쳤죠. 애 아버지 이름은 최재완인데 발음이 어려웠는지 ‘최재원’이라고 말했어요.”
하늘색 점퍼와 내복 바지, 주황색 구두 차림으로 나간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윤씨는 가슴이 미어진다. 폭우가 쏟아지거나 날이라도 추우면 아픔은 배가 된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표현이 분명한 아이였는데 얼마나 힘들까. 누가 그 고통을 알아줄까 하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18년간 애태우면 살아온 윤씨의 가슴을 멍들게 한 것은 또 있다.
“애를 잃어버린 상태라고 아무리 말해도 병무청에서 통지서가 날아와요. 군대 가라고. 몇 번을 설명해도 또 옵니다.” 결국 윤씨는 아들의 주민등록을 말소시켰다. 가슴 한 구석이 허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라도에 있는 보육원을 이 잡듯이 뒤지고 점도 수 차례 봤다. ‘아들이 높은 곳에 있다’는 무속인의 말이 신경쓰여 높은 지대마다 실종 포스터를 붙이기도 했다. 실종 직후에는 나이와 생일을 묻는 전화와 각종 제보가 끊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뚝 끊겼다.
아들의 실종은 단란했던 가정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남편과 헤어진 채 큰 아들과 살고 있는 윤씨는 생계를 위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아들을 찾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애가 탈 뿐이다. 활달했던 큰 아들은 동생의 비극이 자기 탓인것만 같아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어미의 직감으로 볼 때 우리 아들은 분명히 살아있습니다. 용하다는 점쟁이 말로는 제가 찾아선 안 되고 아들이 찾아야 만날 수 있다고 하네요. 이제 22세가 됐으니 더 기다려보면 연락이 오겠죠. 제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진 몰라도 우리 아들 얼굴 보기 전까진 이 세상 못떠납니다.”
/wild@fnnews.com 박하나기자
■사진설명=18년 전 최민석씨가 4세일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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