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선덕여왕’은 TV 드라마와 달랐다. 미실의 방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퇴폐적인 카바레를 연상시킨다. 미실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야한 옷차림이다. 미실의 동생 미생은 춘추를 꾀어 술집 작부들과 질펀한 술판을 벌인다. 덕만과 비담의 정체 등 신국(神國)의 비밀을 밝히는 저잣거리의 소극은 한바탕 각설이타령 또는 마당극을 닮았다. 드라마의 단순 축소판을 거부한 뮤지컬 ‘선덕여왕’의 차별화 시도는 참신했다.
옛 이야기를 현대와 접목한 좋은 예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JCS)’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뮤지컬의 영화판에서 유대왕 헤롯은 현대식 수영장에서 벌거벗은 여자들에 둘러싸인 채 예수더러 “물 위를 걸어보라”고 조롱한다. 그가 부르는 ‘헤롯왕의 노래’엔 흥겨움이 넘친다. 뮤지컬판 퓨전 사극을 지향하는 ‘선덕여왕’엔 JCS와 유사한 파격이 들어 있다.
눈길을 확 끄는 것은 의상이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디자이너 이상봉의 작품엔 신라 천년의 화려함이 넘실거린다. 피날레 대관식 때 선덕여왕의 황금빛 의상은 황금 왕관 아래서 눈이 부시다. 미실은 관능미 넘치는 옷을 수시로 갈아입고 나와 객석을 유혹한다. 유신랑과 병사들의 갑옷, 춘추의 자유분방한 옷도 예사롭지 않다. 삼성전자의 발광다이오드(LED) TV로 쌓은 최첨단 이동식 첨성대도 볼거리다.
배우들은 저마다 가창력을 뽐낸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한 이소정(선덕여왕), 일본 극단에서 실력을 닦은 차지연(미실), 성악과 출신의 이상현(유신), 제3회 뮤지컬 어워드 남자 신인상에 빛나는 강태을(비담) 등이 극을 이끌어간다.
다만 진행상의 몇 가지 흠은 아쉽다. 먼저 마이크 소리가 너무 크다. 1200석 규모의 우리금융아트홀이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배우들의 노래를 차분히 감상하기 어렵다. 미리 녹음해서 틀어주는 연주와 백코러스도 크고 거칠다. 노래가 연주에 묻힐 때도 있다.
조명은 서툴다. 비춰야 할 곳과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다. 조명은 종종 공연의 수준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이게 엉성하면 톱니바퀴가 어긋난 듯 공연이 삐그덕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무대 불을 끄고 장면을 바꾸는 암전(暗轉)도 덜거덕거리긴 마찬가지다. 장면 전환은 했는지 안했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단 몇 초라도 언제 다시 불이 켜지나, 관객들이 불안하게 지켜봐선 곤란하다. 첫 공연(5일)이라고 둘러대는 건 설득력 있는 변명이 아니다. 모든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막을 올리는 게 이날 눈길을 헤치고 공연장을 찾은 관객에 대한 예의다.
뮤지컬 ‘선덕여왕’은 드라마 판박이를 거부한 참신한 시도로 큰 틀에서 방향은 잘 잡은 것으로 보인다. 배우들도 열심이고 노래도 썩 잘한다. 좀 더 세밀한 손질로 이 분위기를 살려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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