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작품을 위해 물감을 들고 꼬박 10시간 이상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 손봉채는 수백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깨지지도 않는다는 방탄유리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
한 장이 아니다. 두 장, 석 장, 넉 장, 다섯 장이 하나가 된 작품. 공간을 분할해 그려진 그림은 원근감과 입체감이 제대로 살아난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와 눈이 적응할 때의 느낌이랄까. 점차 툭. 툭. 툭 불거지는 작품은 마치 책장을 넘길 때처럼 스르륵 움직이는 그림처럼 보인다. 보이고 보이고 또 보이는 작품은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는 것', 보이는 것 이면의 진실을 말하려는 듯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최근 광주광역시에서 활동하는 작가 손봉채(43)의 '빛을 담은 입체회화'가 주목받고 있다. 아크릴 같은 겹겹의 투명 화면에 유화로 그려진 풍경과 나무 등이 겹겹이 쌓여 동양화로 보이다가도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이 켜지면 색다른 신비함이 가득하다.
3차원 입체와 2차원 회화의 결합. LED 조명으로 더욱 빛나는 그의 작품은 기술과 예술의 결합으로 손봉채를 더욱 진화시키고 있다. 그가 탄생시킨 '입체회화'는 지난해 중학교 미술책에 새로운 회화 기법으로 수록됐다. 올해는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관람객 110만명을 돌파한 광주광역시 '세계 광엑스포'와 미디어아트 축제 '디지페스타'의 주요 작가가 됐고 지난달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오픈아트페어에서 관객몰이를 했다. 하반기엔 뉴욕에서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광주에서 KTX를 타고 3시간반 걸려 서울에 왔다는 작가를 갤러리에서 만났다. 그는 6일부터 서울 청담동 앤디스갤러리에서 11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다.
고수머리에 우락부락한 인상과 달리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할 땐 격한 감정에 웃음 섞인 눈물이 글썽였다. 1996년 신세계미술제 대상, 1997년 광주비엔날레 최연소 작가, 쌈지스튜디오 1기 작가로 전도 유망했던 작가는 한때 돈 때문에 작업도 포기할 정도로 바닥을 살아냈다. 그림 작업은 "'나에게 창이고 휴식'이라는 그는 "요즘 무척 바쁘고 일이 많지만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 손봉채/물소리 바람소리ⅰ_폴리카보네이트에 유채,l.e.d_161x122cm_2009-2010 |
―그림의 화면은 아크릴 같아 보이는데 재료가 폴리카보네이트라고 써 있다. 무엇인가.
▲방탄유리 일종이다. 아크릴 강도보다 300배 강하다. 변함없는 소재를 찾고 찾다가 7년 전에 발견했다. 일본·독일에 있었다. 처음엔 수입품을 사다가 작업했다. 초창기 작업은 재료비가 비싸 작품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 이후 몇 년이 지나 국내에서도 이 재료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크릴은 실내용이었지만 이후 외장용으로 만들어졌다. 지하철역사에 있는 아크릴 같아 보이는 게 모두 폴리카보네이트다.
―재료비도 비싼데 굳이 아크릴을 버리고 이 재료를 선택한 이유는.
▲"아크릴도 변한다"는 소리를 듣고 고민하던 차에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폴리카보네이트라는 신소재가 일본에서 개발됐다는 말을 듣고 선택한 것이다. 이전엔 사진필름지를 사용했었다. 필름 그 자체로 사용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누렇게 변했다. 변하지 않는 게 무엇일까 연구하다가 유리에 작업했다. 깨끗하고 보기엔 좋았는데 무게가 엄청났다. 컬렉터가 구입했는데 작품 무게 때문에 벽이 버티지 못할 정도였다. 또 외국전시 갈 때 유리가 깨지는 일도 있었다. 그 다음에 사용한 것이 아크릴이다. 두께 문제로 시행착오가 많았다. 3㎜부터 0.1㎜까지 연구했다. 0.1㎜는 작품이 어른어른해 보인다. 지금은 0.2㎜다. 입체표현이 가장 좋다. 2007년 아크릴 작업으로 KIAF에도 나갔다. 이이남과 함께 나인갤러리 소속으로 출품했었다.
―그때라면 이이남 작가가 움직이는 병풍 그림으로 뜰 때다. 그런데 손봉채는 보지 못했다.
▲하하. 이이남(작가가 2년 선배다)보다는 눈길을 못 끌었지만 당시 꽤 팔렸다. 큰 작품은 아니었고 소품이었는데 학생들의 신기하다는 반응이 대단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진 자체를 사용했다. 그런데 사진을 사용하니 희소성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 이후 아크릴에 유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소과 출신인데 회화작업을 한다. 트렌드를 좇은 것인가.
▲회화를 접목한 것은 재료비 때문이었다. 설치 작업은 재료비가 상당하다. 돈 안 드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이전에 돈 때문에 아픔도 있었다. 물감 놓고 붓으로 꼼지락꼼지락 그리고 있으니 재미있고 재료비도 많이 안 들어 좋았다. 용접하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그림을 그렸는데 차라리 용접하는 게 낫다고 생각들 정도로 힘들었다. 세필로 그리는데 작품당 10시간 이상 걸린다. 나와 싸움이다. 큰 작품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3m×250㎝ 크기에 도전할 것이다.
―겹겹이 쌓은 입체회화, 어떻게 나오게 됐나.
▲시간강사 할 때였다. 시험감독으로 들어갔는데 조용한 교실에서 어디선가 계속 반짝반짝거렸다. 다가가면 아무것도 없고 학생들에겐 커닝페이퍼도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 반짝이는 게 의심스러워 한 학생에게 다가서다가 투명필름을 발견했다. 시험지에 갔다 대니 깨알 같은 글자가 시커멓게 보였다. 커닝페이퍼의 진화였다. 1980∼1990년대 볼펜, 허벅지, 손바닥에 적은 커닝페이퍼는 순진했다. 2000년대 커닝페이퍼는 과학이었다. 그렇게 가져온 시험지와 필름을 책상에 놓고 있다가 채점을 하려고 펼치는 순간 필름 속 글자들이 시험지에 배겨 '사사삭' 입체로 보였다. 아, 이거다 했다.
―중첩된 이미지 만큼 숨겨진 메시지도 많은 것 같다.
▲아버지와 함께 전남 곡성의 한 계곡에 간 적이 있다. 골짜기 풍경은 더없이 한적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는 나를 섬뜩하게 했다. 아버지 기억엔 그 계곡은 빨간물이었다. 그곳은 경찰가족 120여명이 사살된 여순사건 장소였다. 이후 2003년부터 역사적 상처를 가진 현장으로 눈을 돌렸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모습으로 비치는 풍경들에 사실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가를 담고 싶었다. 물리적으로는 다섯개 화면에 불과하지만 개념적으로 시공간을 분할하는 것으로 수십·수백겹이 될 수도 있고 수백·수만시간을 넘나드는 공간이다. 나는, 진정한 나를 잘 살피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프로의 세계 입문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던가. 한때 키네틱아트 선두주자에서 조선소 선박 수리공, 포장마차까지 전전했지만 변하지 않는 재료처럼 작업에 대한 열망은 그의 원동력이 됐다.
방탄유리에 유화로 그린 LED 아트. 전기코드와 연결된 그의 작품은 기계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자연과 도시풍경 등 100호·50호 입체회화 14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오는 22일까지 이어진다./hyun@fnnews.com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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