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쩍 벌어졌어요. 이런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다니,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나도 할 수 있는데…. 언젠가 우리 작품으로 다시 여길 와야겠다, 그런 다짐을 했어요."
에이콤 윤호진 대표(62)의 뮤지컬 '명성황후'는 이때의 각오가 만들어낸 그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문열의 창작 희곡 '여우사냥'을 각색해 윤석화가 1대 명성황후로 선보인 이 작품은 9월이면 꼭 15주년을 맞는다. 5년여 준비기간을 포함하면 윤 대표가 명성황후에 매달린 시간은 꼬박 20년이다.
"사실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요. 시대가 그리 만들었다고 봅니다. 한창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을 때 명성황후가 준 교훈이 관객들에게 와 닿았다고 봐요."
공연 횟수만 1000회, 국내 관람객 130만명, 해외진출의 물꼬를 튼 첫 창작뮤지컬. "뗏목을 타고라도 브로드웨이를 가겠다"며 들었던 깃발은 뉴욕, 로스앤젤레스, 토론토 등 해외 곳곳에다 내려 꽂았다. 해외서의 호평은 국내 흥행을 다시 부추겼고 시간이 흐를수록 '명성황후'는 '국민 뮤지컬'로 자리잡아갔다. 15주년 '명성황후' 공연은 9월 성남아트센터에서 올려진다.
흥행작엔 공식이 있는 걸까. 윤 대표는 흥행엔 중요한 3대 포인트가 있다고 말한다. "강렬한 내용, 보편성, 시의성 세가지입니다. 내용이 강한 인상을 줘야 하고 그 다음엔 어느 계층이든 공감할 수 있어야죠. 마지막은 어느 시기에 그 작품을 올리느냐, 이것도 굉장히 중요해요. 명성황후는 시해 100주기여서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면이 있었거든요."
지난해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기에 맞춰 무대 올린 창작뮤지컬 '영웅'도 이 공식을 따른다. 35억원을 들인 대작. 100년 전 이야기지만 탄탄한 스토리에 기차가 공중으로 붕 뜨는 스펙터클한 무대 등이 압권이다. 흥행 루트가 '명성황후'와 비슷하다. 내년 8월엔 뉴욕 링컨센터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앞으로 10년은 생생하게 더 달릴 작품"이라며 윤 대표는 웃는다. 영웅은 오는 11월 국립극장에서 다시 무대에 오른다.
1991년부터 단국대에서 공연영화학부 교수로 재직해 온 윤 대표는 올 3월부터 처음으로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학교를 쉬면서 뉴욕, 런던 등지를 다니며 최신작을 눈여겨보고 있지만 가장 많이 드나드는 곳은 일본이다. 사실 그는 요즘 일본 뮤지컬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국내 시장만으로는 이제 한계가 많아요. 성장속도도 더디고요. 해외서 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에요. 일본 시장은 자체 창작물은 거의 없이 주로 라이선스로 공연을 올리지만 전체 규모가 우리보다 10배 이상 됩니다. 일본시장이 대안이 될 수 있어요."
그동안 해외서 숱하게 공연을 올렸지만 그때는 한국 뮤지컬을 세계에 알린다는 의미가 컸다. 윤 대표는 이제 알리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해외서 수입을 올리겠다는 다부진 각오로 뛰어들고 있다.
최인호 원작의 '몽유도원도'는 일본시장을 겨냥한 창작물이다. '명성황후' '영웅'을 잇는 그의 차기 야심작. 지난 2002년 국내서 한 차례 무대에 올린 적이 있지만 '명성황후'에 밀려 공을 많이 들이진 못했다. "이번엔 한국의 음색을 제대로 살릴 겁니다. 무대 위에 물을 흘리고 배를 띄워서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할 수 있을 거예요." 일본 제작사와 공동으로 한·일 동시공연 방식도 추진 중이다. 곡은 일본의 유명 작곡가가 맡는다.
윤 대표는 '명성황후' '영웅'의 일본 정식 공연도 기획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지는 가장 빠른 길은 문화적 교류를 통해서예요. 명성황후가 일본에서 공연되면 이 작품은 비로소 전설이 되겠죠."
2년 뒤엔 학교를 정년퇴임한다는 윤 대표. 하지만 그의 뮤지컬 인생에 퇴임이 있을까. 그는 '몽유도원도' 후속작으론 조선 황실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를 다룬 작품을 구상 중이다.
/jins@fnnews.com 최진숙기자
■사진설명=이제는 한국 뮤지컬이 정식 무대를 통해 해외에 자리를 잡아야 할 때라고 말하는 윤호진 에이콤 대표. 그는 '명성황후' '영웅' '몽유도원도'로 일본 뮤지컬 시장을 적극 공략할 것이라며 환히 웃는다. /사진=김범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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