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경제석학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국내외에서 제기되고 있는 금리인상을 비롯한 출구전략 논란에 대해 "너무 이르다"며 걱정했다. 파이낸셜뉴스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장 교수와 전화인터뷰를 갖고 그의 혜안을 들어봤다.
■금리인상, 아직 이르다
"호주가 금리를 올린 건 수출의존도가 높은 1차상품의 원자재가격 상승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았기 때문이에요. 한국은 아직 인플레이션 압력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이제 겨우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는 상황이에요. 출구전략을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금리인상에 대한 장 교수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는 "영국도 대공황 이후인 지난 1931년 경기가 좋아지고 있을 때 재정적자를 줄여서 수년 간 고생했던 경험이 있다"면서 "거시정책은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늦다 싶을 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경제정책을 시간표를 정해놓고 시행하면 안된다고도 했다. 경제는 시간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구전략 시행 여부는 '몇 분기 동안 성장이 지속되면', '세수 증가 속도가 얼마가 되면' 등의 구체적인 지표를 놓고 결정해야지 언제까지 한다고 시간을 정해 놓고 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예단해서 일찍 시행했다가 틀어지면 낭패를 볼 수 있어요. 경기가 회복되면 세수가 늘어나고 재정적자는 줄어들 수 있습니다. 재정적자를 언제까지 얼마를 줄이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저금리 장기화로 자산시장에 거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장 교수는 "일리는 있지만 이자율을 올려서 해결하는 건 맞지 않다"고 했다. 대신 "주택담보대출 규제나 다른 적절한 규제정책을 통해 주택시장 자체를 공략하는 게 맞다"고 했다.
그는 "이자율은 경제 전반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면서 "이자율을 갑자기 올릴 경우 돈을 빌려서 생산 및 수출을 해야 하는 제조업체들에게 큰 타격을 줘 경제 전체가 힘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본이동 통제해야
한국이 반복적으로 외환위기를 겪는 원인에 대해 장 교수는 '완전개방'에 초점을 맞췄다. 규모가 작은데도 너무 개방해 놓아 외부에 휘둘리고 충격에도 약하다는 것이다. 선진국이 되기 전까진 자본통제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한국 주식시장이 신흥국들에 비해선 크지만 미국 주식시장의 1∼2% 규모에 불과합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미국시장에 있는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하는 일인데 우리에게는 큰 충격을 주죠. 시장이 완전히 성숙해져서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자본시장을 완전히 개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전에는 무조건 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요즘에는 선진국이 아닌 나라들은 어느 정도의 자본통제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고 있어요."
■남유럽, 재정지출 줄이면 안돼
현재진행형인 유럽의 재정위기에 대해 장 교수는 재정 남발이 원인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침체로 세수가 줄어든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지금 재정지출을 줄이면 더 위험해진다고 경고했다.
"영국은 노동당 집권기간 동안 옛날 보수당보다 더 조심스럽게 재정을 운용했습니다. 재정상태가 좋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영국은 금융에 대한 의존도가 아주 높지 않습니까. 금융위기로 금융기관들이 타격을 받았고 실업자는 250만명이나 됐습니다. 세수는 떨어지는데 실업보험 등으로 정부지출은 늘어날 수밖에 없죠. 재정을 남발해 위기가 왔다고 비난하면 억울한 나라들이 많아요. 스페인의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가 60%대에 불과합니다. 더 나쁜 나라들도 많은데 말이죠."
장 교수는 "이 나라들이 돈을 막 쓰는 등 무책임하게 행동했으니까 바로잡아야 한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과도한 부채가 안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경기침체에서 겨우 벗어나려는 시기에 정부지출을 갑자기 많이 줄이면 다시 경기가 침체돼 세수가 더 떨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 지출을 깎으면 오히려 재정적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파생상품은 엄격히 규제해야
장 교수는 "금융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금융위기는 재발할 수 있다"며 철저한 개혁을 주문했다. 그는 "지금은 정부의 재정적자를 통해 수요를 유지하고 있으나 이는 병이 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일 뿐"이라며 "병이 안 나게 해야 하는데 그럴려면 금융개혁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먼지가 살짝 가라앉으니까 개혁을 안 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 금융위기로 다 밝혀졌지만 규제완화를 지나치게 하다보니 너무 복잡한 상품들이 등장했어요. 심지어 그 상품들을 거래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규제당국은 물론 같은 금융기관 내 감독 책임자들마저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상품도 많습니다. 그런 상품들을 금지하든지 강력하게 규제해야 합니다. 금융위기를 불러온 책임자들도 처벌해야 해요. 정말로 5년, 10년 안에 금융위기가 또 터지면 그때는 재정적자나 구제금융 등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은행세는 개혁 핵심방안 아니다
정부가 추진중인 '은행세'(Bank Levy) 부과방안에 대해선 장 교수는 부정적이었다. 은행들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워야 하지만 은행세가 개혁 핵심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은행세를 통해 돈을 적립해서 위기가 또 발생했을 때 막는 비용으로 쓰자는 시각도 있습니다만 강제로 자동차보험을 들게 하듯 하는 건 해결책이 안된다고 봅니다. 근본적인 시스템 개혁이 되지 않으면 위기는 반복됩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들과 잘못된 신호체계는 그냥 놔두고 자동차보험만 강제화하면 사고 처리는 좀더 수월해질지 모르지만 사고는 계속 나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은행들이 국내외적으로 과점체제인데 결국에는 소비자들에게 부담이 전가될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보험 차원의 은행세를 도입하는 것을 금융개혁의 골자로 이야기하는 것은 규제와 개혁을 안 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국제 신용평가기구 설립해야
장 교수는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국제신용평가사들의 책임을 거론하며 국제 공공기구 형태의 신용평가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는 "3대 신용평가사가 과점 형태여서 하라는 경쟁은 안 하고 기껏 자산 파는 사람한테 '잘 해줄테니 돈 더 내라'는 경쟁만 해왔다"면서 "이를 규제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국제 공공신용평가기구를 만들어 억지로라도 신용평가업의 경쟁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파생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규제완화를 했고, 자본시장 개방하라고 해서 자본시장도 열었습니다. 결국 잘 모르는 나라 사람들이 투자하게 됐죠. 그런데 한국에 있는 펀드매니저가 그 상품을 속속들이 알 수 없습니다. 신용평가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죠. 문제는 신용평가사 역시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없다는 거죠. 또 자산을 파는 사람한테 돈을 받는 구조여서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신용평가는 완전히 국제화된 문제로 이를 국제적인 공공재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AAA도 못 믿는다는 것은 시장 자체의 붕괴를 의미하는데 현재로서는 민간에서 새로운 평가기관이 등장해 경쟁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제환경규제기관을 만들듯 국제적인 공공기구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볼커룰,방향 맞지만 불충분
장 교수는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 중인 '볼커룰'(Volcker Rule)이 올바른 방향이긴 하지만 불충분하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예금보험이 있는 상황에서 예금받은 돈으로 도박을 한다는 건 문제지만 투자은행과 예금은행 사이에 장벽을 치는 볼커룰만으론 이번 위기를 가져온 투기적 금융의 비대와 그에 따른 금융불안 제고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것이라는 뜻이다.
"투기성 자본시장이 너무 커졌어요. 예금자들의 돈이 못 들어가게 한다면 어느 정도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그게 망하면 다른 경제 일반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마디로 '카지노니까 망해라…' 이렇게는 못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카지노와 일반가계를 분리한다 해도 카지노가 너무 커 버리면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제너럴모터스(GM)도 정부가 보험을 제공하는 기업이 아니었지만 너무 크니까 정부에서 구제금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아닙니까."
장 교수는 "얼마 전 부산에서 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총재 회의를 보니 경제사정이 조금 풀리니까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줄어드는 것 같다"며 "남은 4개월 동안 큰 일이 생겨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지금처럼 어영부영하는 상황이라면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도 획기적인 합의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blue73@fnnews.com윤경현기자
■장하준 교수(47)는 '유치경제론' 분야의 세계적인 경제학자다.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영국 등 주요 국가들의 경제성장은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했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산업발전 수준에 따라 단계적 규제와 통제·보호정책을 펼친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장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90년부터 이 대학에서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영국에서 공부한 지 4년 만에, 박사 학위를 채 받기도 전인 27세에 교수로 임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2003년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상'을 받았다. 2005년엔 경제학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에프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의 아들로, 동생인 장하석씨는 런던대 과학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와 장하진 전 여성가족부 장관과는 사촌지간이다.
주요 저서로는 사다리 걷어차기(2004), 개혁의 덫(2004), 쾌도난마 한국경제(2005·공저), 국가의 역할(2006), 나쁜 사마리아인들(2007),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2008) 등이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한때 국방부 금서 목록에 포함돼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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