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세종문화회관이었다. 1968년 김자경오페라단이 20년 만에 선보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보기 위해서였다. 김자경오페라단은 1948년 ‘라 트라비아타’를 처음 국내서 무대에 올렸고 그 두번째 공연을 20년 만에 가졌던 것. 돈만 생기면 미제 LP판을 모으는 것도 취미였다. 지금까지 모은 LP판은 700장가량 된다.
뼛속까지 문화애호가인 임연철 국립극장장(62). 대학 졸업 후 언론사 문화부 기자로만 25년, 언론사 사업국 국장을 거쳐 예술대학원 초빙교수도 지냈다. 서울 장충동 남산 자락의 국립극장 수장으로 자리를 옮긴 지 이제 1년9개월째. 3년 임기 중 절반을 막 넘기고 ‘집권 후반기’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스치고 지나갔던 지난 2일 오후 국립극장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임 극장장은 나이에 비해 확실히 동안(童顔)이다. 비결은 에어로빅. 아침마다 동네 헬스장에서 에어로빅으로 체력을 다진 게 올해로 14년째다. 처음엔 몸에 딱 달라붙는 쫄바지를 입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지만 지금은 주변을 의식해 쫄바지 위에 헐렁한 옷을 입는다. ‘에어로빅 동문’들은 가끔 국립극장을 찾아 임 극장장과 함께 공연을 보기도 한다.
그의 극장 경영은 에어로빅 음악만큼이나 역동적이다. 그가 이곳으로 부임하며 내걸었던 캐치프레이즈는 ‘관객 개발’이었다.
“전통예술을 현대화하는 국립극장은 레퍼토리가 굉장히 우수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합니까. 관객들이 오질 않는 걸요. 우리가 관객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국내 오페라 기본 관객은 전국적으로 4만명 정도 됩니다. 한번 공연할 때 4회 정도 하는데 대충 1만명이 객석을 채웁니다. 국악은 기본 관객이 3000∼4000명이고 실제 공연장을 찾는 사람은 이 중 10%인 300∼400명 정도예요. 그러니 기본 관객을 확장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 거죠.”
가장 먼저 손을 댄 건 ‘학생 관객’의 저변을 넓히는 일이었다. 지난해 6월 첫선을 보인 ‘국립극장 고고고(보고 듣고 즐기고)’는 야심찬 계획 속에 기획된 청소년 공연체험 프로그램. 연극 ‘별주부전’ ‘시집가는 날’ ‘봄봄’과 국악 음악회 등으로 청소년의 국악감각을 높이도록 했다. 지난해 ‘고고고’를 다녀간 이는 총 1만4000명. 올해 목표는 4만명이다. “이렇게 10년 하면 고고고 경험자는 40만명 정도 되겠죠. 이 중 10%만 공연장을 찾아도 4만명분 객석이 차지 않을까 기대를 하는 겁니다.”
지난해 5월 시작한 ‘황병기와 함께하는 정오의 음악회’는 주부들을 공략한다. 황병기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이 매달 셋째 주 화요일 오전 11시에 다양한 레퍼토리로 주부들을 남산으로 불러모은다. 동서양 음악을 섞고 뮤지컬 스타나 재즈·클래식 유명인들을 초빙해 맛있는 이야기상도 차린다. 초창기 500명이던 관객은 이제 1200명까지 불었다.
기업 최고경영자는 수익기여도 면에서도 쏠쏠한 관객들. 올해 처음으로 개설한 ‘전통예술 최고경영자 과정’은 기대보다 호응이 크다. 지난 4월부터 10주 기간으로 진행된 1기 과정엔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 변인근 중앙디자인 회장, 이순조 명승건축그룹 회장 등 43명이 참가했다. 교육은 단가, 단소 실습과 강의로 이뤄졌다. “과정을 수료한 CEO들은 춘향가 중 ‘사랑가’는 대부분 소화하고 있어요. 10월 중순부터 2기 과정이 시작되고 중급반도 새로 생길 겁니다.”
30∼40대 관객을 겨냥한 프로그램은 이달 첫선을 보였다. 지난 2일 시작한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여우락)’는 해외서 활약 중인 전통음악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벌인 퓨전국악 페스티벌이다. 오는 11일까지 이어질 ‘여우락’에 공명, 노름마치, 소나기프로젝트, 들소리 4개 팀이 무대에 선다.
임 극장장은 올겨울 국악 전공자를 상대로 국악 콩쿠르를 열 계획도 있다. 우승자에게는 다음 연도 여우락 페스티벌 초청자격을 부여하는 한편, 국악 콩쿠르를 내년부턴 국악 록페스티벌로 정착시킬 구상도 하고 있다. “국립극장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안정적인 관객층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싶어요. 국악을 모르면 손해본다는 생각을 가지게끔 할 겁니다. 하하”
극작가 유치진, 연극인 이해랑씨가 주축이 돼 문을 열었던 국립극장은 올해로 60주년을 맞는다. 국립극장은 창립 60주년을 맞아 다양한 잔칫상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3월부터 계속되고 있는 노조와의 갈등은 그가 풀어야 할 불편한 숙제다. 예술단 오디션 문제, 성과급 지급과 관련한 노사 대립으로 최근 공연 파행마저 빚어지고 있다. 임연철 극장장은 "예술감독 통솔 아래 있는 예술단 단원들과 친숙하게 지내지 못한 게 아쉬운 점"이라며 "노사 문제는 원칙에 입각해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jins@fnnews.com최진숙기자
■임연철 국립극장장 약력 △충남 논산 △서울대 사학과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부장 △동아일보 편집국 부국장 △동아일보 사업국 국장 △중앙대 예술대학원 초빙교수 △국무총리실 정책평가위원 △서울시향 비상임 이사 △국립극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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