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한국의 匠人’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김표영 배첩장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11.04 18:42

수정 2010.11.04 18:42

“시간을 거스르는 작업이야. 핀셋 한 번, 붓 한 번 잘못 놀리면 그 문화재는 영영 사라지는 거야. 그래서 국보급은 밀가루풀 하나 만드는 데도 15년이 걸려. 새끼손톱만한 종이를 떼어내는 데 만 하루 반이 걸린 적도 있지. 일본에서는 국보 배첩 하나를 하는 데 10년을 잡기도 한다더라고.”

한번 훼손되면 시간을 돌이키지 않는 한 어쩔 도리가 없는 것들이 있다. 오랜 세월 내려온 문화재가 대표적이다. 중요무형문화재 배첩장 기능보유자 김표영씨(85)는 그런 면에서 어쩌면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사람이다.

배첩(褙貼)이라 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도 표구라 하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표구는 일본말인데다 배첩에 견주어 작업의 격이 한층 떨어지는 말이다. 표구가 단순히 그림이나 글씨에 종이와 비단을 붙여서 미적 가치를 더하는 것이라면, 배첩은 거기에서 나아가 보존성을 높여 서화의 문화적 가치를 높여주거나 실용성을 보충하는 전통적인 서화처리법을 말한다. 또 서화뿐만 아니라 고서의 얼룩을 지우거나 떨어져나간 장정을 새로 씌우는 일도 배첩에 속한다. 배첩에서 배(褙)의 의미도 ‘등(背)’에다 ‘옷(衣)’을 입힌다는 뜻이 담겨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배첩장은 김표영씨가 유일하다. 지류문화재 수리사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의 연륜과 솜씨에는 미치지 못한다.

경기도 일산 백석동의 풍산아파트형 공장에 ‘지류문화재연구소’란 간판이 걸려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실은 330㎡ 규모로 꽤 넓었다. 일반 표구와는 달리 괘불이 워낙 큰 작품이 많아서 좁은 곳에서는 작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는 서울 인사동에서 25년, 갈현동에서 20년 정도 있다가 2004년 이곳으로 옮겼다.

그는 80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60대처럼 건강했고 컴퓨터를 웬만큼 다루었다.

사실 책이나 글씨, 영정이나 불화 등은 그 자체만 가지고는 완성품이라 할 수 없다. 거기에 배첩이 더해져야 문화적 가치를 얻게 된다. 배첩을 그림 뒤쪽에 종이 한 장 붙이는 것쯤으로 여겨 작업 과정이 단순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생각만큼 배첩이 간단하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국가지정문화재만 전문으로 수리하는 이곳에서는 과정 하나하나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피말리는 과정이다.

배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풀과 종이다. 그가 배첩에 사용하는 풀은 손수 만든 것으로 10년 이상 묵은 풀이라고 한다. “이 풀이 밀가루로 만든 거야. 물에 담가서 오래 썩히는 거지. 썩으면 물갈아 주고, 그렇게 물을 갈아주다 보면 이물질은 전부 쏟아져 나가게 되고, 순수한 풀만 남게 되지. 밀가루 3포대 담아서 10년 물갈아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어.”

■풀 쑤는 데만 10년 걸려

배첩에 쓰는 한지도 그는 까다롭게 고른다. 좋은 한지를 쓰는 것은 곧 보존성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입 한지 원료를 가지고 화학약품 섞어서 뜬 것은 못 써. 그래서 나는경북 안동에서 특별히 맞춰서 쓰지. 옛날에는 닥나무 검은 껍질을 전부 훑어서 희게 만들었는데, 요새는 독한 세제에 넣어 표백을 하니 그 약품이 얼마나 독한 거야.”

영정이나 괘불과 같은 그림에 견주어 고문서나 경책 등의 배첩은 과정이 그리 복잡한 편은 아니다. 오래된 책을 수리할 때는 우선 한 장 한 장 떼어서 연필로 쪽수를 매겨놓고, 뜯어낸 낱장을 따뜻한 물에 넣는다. 물먹은 종이가 풀어질 것 같지만, 한지는 절대로 풀어지지 않고 오히려 종이에 묻은 때만 누렇게 우러난다. 이때 먹빛깔도 더 선명해진다.

“우리 한지가 그래서 좋은 거야. 한지라는 것은 빨래를 해도 괜찮아. 그런데 요즘은 찾는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그것을 만드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어. 몇 해 전 해외 세미나에 갔는데 외국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의 한지를 일본 것으로 알고 있어. 큰일이야.”

이렇게 때가 빠진 종이는 건져내 건조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쪽수별로 장정을 하게 된다. 보통 장정을 할 때는 다섯번 꿰매는 오침을 한다. 이렇게 해서 누렇게 얼룩이 졌거나 거뭇거뭇 때가 낀 책이 새 것처럼 하얗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동안 이렇게 그의 손을 거쳐간 국보·보물급 문화재만도 수백여점에 이른다. 그가 본격적으로 국가 지정 문화재를 수리하기 시작한 것은 1978년.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창덕궁 등 주요 기관의 지류문화재 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별로 없다.

그가 처음 지류문화재 수리기능사 자격증을 딴 것은 1973년인데, 그 후로 12년 동안 지류문화재 수리기능사는 그가 유일했다고 한다.

“그때는 300만원 이상 비용이 드는 작업의 경우 공개입찰을 해야 하는데, 할 사람이 나 밖에 없으니까 1000만원짜리도 나와 수의계약을 하고 그랬지. 그 후로 후배가 조금씩 배출되긴 했지만 문화재 수리 경험이 없으면 할 수가 없었지.”

그런 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1996년 3월 뒤늦게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2호 배첩장이 되었다. 수많은 수리문화재 가운데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1986년에 했던 쌍계사 괘불이라고 한다. 괘불로서는 첫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괘불은 처음이었는데, 거기 스님이 일하는 도중에 전부 버려놨다고, 제대로 해놓으라고 그러는 거야. 배첩에 대해 잘 모르다 보니 망쳐놓는 것으로 보였던 거지. 결국은 다 해놓으니까 이 사람 한국의 제일이 아니라 세계의 제일이라 그러더군.”

당시 작업했던 괘불의 높이는 14m, 너비가 6m짜리였다. 그동안 작업했던 것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은 대암사 괘불로 높이가 14m, 너비는 9m70㎝였다고 한다.

그가 처음 배첩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4세 때로,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촌 매형이 운영하는 표구사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시작했다. 그때는 먹고 살기 어려울 때라서 뭐든지 해야만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옛날에는 문도 바르고 도배도 하고 그랬어. 지금과 같은 배첩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지.”

처음 칼 가는 데 2년, 풀 쑤는 데 2년이란 세월을 보내고서야 그림 옆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설 수 있었다는 것 뿐이지 곧바로 수리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광복이 되자 그는 표구사를 그만두고 경찰학교에 들어가 3∼4년 경찰생활을 하게 된다. 그가 다시 표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53년. 충북 청주에서 함께 일하던 형이 그를 서울로 데리고 온 것이다.

“그때 두어 군데 표구사를 거쳐 ‘박당’이라고 인사동에서 표구를 제일 잘한다는 곳에 들어갔어요. 그러고 한 1년 후 그곳을 나와 그 앞에 영일표구사를 차리게 된 거죠. 그때 박당 드나들며 음으로 양으로 15년 배웠어요.”

당시 인사동 인근엔 3∼4개 표구사밖엔 없었다고 하며, 박당 표구사는 서울에서도 가장 알아주는 표구사였다고 한다.

처음 그가 영일 표구사를 차렸을 때는 어려움도 많았다. 생면부지의 서울에서 셋집도 얻어야 하고 재료 사서 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18세에 결혼을 해 부양할 가족도 딸려 있었다.

하지만 솜씨가 좋았던지 그의 표구사에는 단골이 꽤 많았다.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다행히 좋은 일도 많았고 좋은 단골도 많아 그리 빡빡하지는 않았어.”

■일감이 없어 배우려는 사람도 없어

“배첩이라는 것이 진짜 기술자의 손이 아니면 못하는 게 많아요. 이거 쉽게 할 수 있다 덤볐다가는 섣불리 망치기 쉬워. 고물 수리하는 거긴 하지만, 보존 과학도 생각해야 돼. 이 수공일이라는 게 밥은 굶지 않지만 돈벌기는 어려운 거야.”

60여년 넘게 배첩 일을 해왔다. 그의 나이 이제 85세. 돈 벌겠다는 욕심은 일찌감치 접었다. 단지 문화재를 하나라도 더 보수해야겠다는 사명감이 그의 의욕을 북돋우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요즘은 일감이 없어. 일정 규모 이상되는 법인에만 문화재 보수 계약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일감이 없으니 배우려는 사람도 없어. 이제 이수생이 서넛뿐이 안 돼. 그나마 희소성 때문에 돈벌이가 되지 않을까 해서 배우겠다는 거야.”

/글·사진 mskang@fnnews.com강문순기자

■사진설명=중요무형문화재 102호 배첩장 김표영씨가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의 탁본을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고 있다. 사진의 탁본은 비교적 초기에 탁본을 떠 글자가 선명하다. 비문을 소유하면 액이 가시고 복이 들어온다고 해 수도없이 탁본을 뜨면서 일부 글자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척주동해비는 1660년 조선 현종 때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목 선생이 해일이 심하게 쳐 마을 상당수가 물에 잠기자 이를 막기 위해 만리도에 세운 것이다.

■배첩이란 글씨나 그림에 종이, 비단 등을 붙여 족자·액자·병풍 등을 만들어서 아름다움은 물론 실용성 및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인 서화처리법을 가리킨다. 일제시대에 들어온 말로 오늘날에는 '표구(表具)'라고도 한다.

배첩장은 조선 전기에 회화를 담당하던 국가기관인 도화서 소속으로 궁중의 서화 처리를 전담하던 사람을 말한다. 표구도 그렇지만 옛날 병풍장이나 책장이라는 장인의 일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배첩이었다. 배첩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목판 인쇄술과 제지기술의 발달로 배첩 기술도 한층 발달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의 '예전'과 '공전'에는 배첩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지도를 배첩하여 족자를 제작하고, 왕실에서 영정을 보수하는 일 등이 기록돼 있어 당시 배첩장의역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중국 한(漢)대가 기원으로 알려진 배첩은 당(唐)대에 한층 발전하여 정립 단계에 이른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 고분 벽화의 병풍 그림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전해져 한국 배첩의 기초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첩은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꾸준히 발전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배첩장이라는 전문가가 등장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배첩의 제작기법 내지 형태는 액자·병풍·족자·장정 및 고서화 처리의 다섯 가지이다. 액자는 비단 재단-그림 초배-재배-건조·액자틀 준비-조립의 작업 과정을 거친다. 병풍의 한 폭 처리도 액자와 같다. 족자의 작업 과정은 재단·초배·겹배·건조·삼배·건조·축목(軸木)·반달부착으로 이루어진다.
장정(裝幀)은 표지나 속지가 손상된 고서의 처리를 말한다. 고서화(古書畵) 처리는 손상된 고서화를 되살려내는 작업이기에 높은 안목과 세밀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배첩은 전통공예기술로 가치가 크며, 기능보유자 김표영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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