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경제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에게 최근 유럽연합(EU) 정상회의의 결정은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불과 10여년 전 유럽 지도자들은 '리스본 협약', 즉 유럽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지식기반 사회'로 만든다는 기치 아래 팡파르를 울렸다. EU 정상회의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제안한 이 새로운 '경쟁성 협약'은 그러나 국제적인 웅장함 대신 유로 생존에 꼭 필요한 조치로 간주됐다.
EU 회원국들의 법인세를 프랑스와 독일 수준으로 올린다는 암묵적인 조항 외에는 표면상 경쟁협약에는 비논리적인 구석이라곤 없다. 은퇴연령을 67세로 올리고, 임금연동제를 폐기하며 헌법에 부채한도를 제한하는 규정을 명시한 것도 유로권의 경쟁력을 높이고 신뢰를 재확보하기 위한 합리적 방안들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부 지도자들은 이번 리스본협약 실패에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했다. 현 계획은 2가지 이유에서 실패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첫째, 정책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목표와 시기가 명확해야 한다. 프랑스는 경쟁성 협약을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은퇴연령을 67세로 올린다는 약속에서 멀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늘상 있는 대세를 따르는 방식으로 비춰 볼 때 결국 연금의 추가 개혁은 시한과 뚜렷한 목표 대신 상한선을 열어둔 채 모호한 목표를 세우는 식으로 변질될 것으로 보인다.
둘째, 목표가 특정하다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구속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협약을 따르지 않을 경우 제재수단이 있어야 한다. 리스본협약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경우 어떤 불이익도 없는 '수박 겉 핥기' 식 대응, 즉 '개방적 수단을 통한 조정(OMC)은 범국가적 차원의 개혁을 시작하도록 하는 데 명백히 잘못된 접근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EU집행위원회가 입법수단이 있고 정치적인 제재를 취할 수 있는 경우에도 회원국들은 요구조건을 '수정'함으로써 제재를 피할 수 있다. 실제로 독일과 프랑스는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라는 재정적자 상한선을 더 이상 맞추기 어렵게 되자 안정과 성장협약을 '유연하게' 바꾸려 시도하기도 했다.
경쟁성 협약을 강제하는 데 있어 EU집행위를 한쪽으로 비켜 세워둔 것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역사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순수하게 각국 정부 간 협력체만으로는 협약이 제대로 이행될 수 없다. EU 회원국이 스스로 성과를 감독하고 동료 회원국이나 자국에 제재를 강제하리라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 같은 체제는 정치적으로 마치 죄수들이 교도소를 감독하도록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U 지도자들이 불과 1년 전에 경제개발 청사진으로 제시한 '유럽 2020 전략'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이번 경쟁성 협약의 실패는 조율이 안 된 즉흥적 실수투성이 정책결정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유럽의 인구구성 변화전망을 토대로 한 은퇴연령이 됐건, 재정건전성에 대한 이행규정 제정이 됐건 유로권 국가들이 기본협약에 합의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당초 단일통화 체제를 구성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금융시장이 잠잠해질 만하면 유럽 지도자들은 정책의 근간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언쟁만 벌이면서 다음번 정상회담으로 해결을 미루고 있다.
다시 유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단일통화 체제를 보호하려면 모호한 목표와 효과없는 제재수단에 얽힌 낡은 리스본협약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정리=dympna@fnnews.com송경재기자
■앤 매틀러 약력 △싱크탱크 리스본 카운슬 공동창립자 △2000∼2003 세계경제포럼(WEF) 유럽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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