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4월.뉴욕으로 향하는 대한항공에 몸을 실었다. 세계 발레의 심장 뉴욕 무대에 서기 위해 50여명 무용수들과 함께였다. 3년이 넘는 시간을 준비했지만 심장이 터질것 같은 긴장감이 그를 엄습했다. 비행기문을 열고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내려버릴까. 머리칼은 쭈뼛쭈뼛 섰고 쿵쾅거리는 가슴은 진정이 안됐다. 관객들이 비웃진 않을까, 까탈스런 평론가들이 비아냥대진 않을까. 그 생각에 14시간 비행시간은 지옥 같았다. 뉴욕 맨하탄 카네기홀 부근의 씨티센터. 유니버설발레단의 뉴욕 입성 다음날 그녀는 무대에 올랐다. 한번은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 오데트로, 한번은 창작 ‘발레’ 심청으로. 공연평은 기대를 훌쩍 넘었다. “세계적인 발레단을 무색케했다”는 평까지 나왔다.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단장(48)은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뉴욕 맨하탄 한복판에서 발레 주역 무용수로 춤을 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문 단장이다. “발레리나에게 뉴욕무대는 당시 세계 최고였으니까요. 어마어마한 재능의 무용수들에게만 허락되는 기회였거든요. 하지만 심청은 통했잖아요. 서양사람들은 스토리는 몰라도 춤으로 무엇을 말하는 지 알았거든요.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라고 했을 땐 가슴이 터질거 같았어요.”
유니버설발레단은 1984년 창단이후 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외공연을 꾸준히 이어왔지만 규모를 갖춘 해외 공연으로는 1998년 이 뉴욕 무대를 1호로 친다. 이 공연 이후 2001년까지 4년간 해마다 해외서 ‘심청’을 올리기도 했다.
유니버설발레단이 1986년 만든 이 ‘심청’으로 다시 작심하고 월드투어 길에 오른다. 100억원을 들여 3년간 미국,유럽,러시아,일본,중동 40여개국 발레 무대를 누비는 대형 프로젝트다. 100억중 통일그룹이 55%가량 지원하고 나머지는 기업후원금 등으로 채운다. 당장 내달 5일부터 10일까지 대만, 5월 싱가포르,7월 미국과 캐나다,9월 일본 공연이 확정됐다.
과거 월드 투어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전액 자비로 이뤄진 당시엔 투자 개념이 강한 공연이었다면, 이번엔 현지 초청이 전제된 것이다. 유니버설측은 항공료,화물운송비만 대고 대관료,숙박비,마케팅비 등 현지 비용 일체는 초청 극장측에서 지불한다.
과거엔 무용수로 투어에 나섰던 문 단장 입장에선 이제 최고경영자(CEO)로 공연 전반을 조율하고 책임지는 역할이라는 점도 다르다. “이제 백스테이지에서 덜덜덜 떨지 않으니 그게 좋은 점이죠. 하하. 하지만 신경쓸게 한두가지가 아니에요. 이번 월드 투어는 ‘예천미지(藝天美地)’라는 저희 발레단 비젼을 각국에 전하는 의미도 있어요. 세계 최고 발레단이 되겠다는 생각보다 발레를 통해 천상의 예술을 보여준다는 데 더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창단 당시엔 한국 발레를 일으켜보자는 생각이 강했고, 첫 해외공연을 나서던 시절엔 한국 발레와 유니버설발레단의 존재를 알리는 게 임무였다면,이번 월드투에에선 몰라보게 향상된 한국 발레의 기량을 보여주면서 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하겠다는 것.
“20년전 앞으로 한국이 발레 메카가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180도 달라요. 메카가 될 수 있겠구나 확신이 들어요. 세계 발레 콩쿠르를 보세요. 우리 무용수들이 다 휩쓸고 있어요. 서양발레는 이태리에서 시작해 프랑스에서 꽃폈고 나중엔 러시아가 다시 유럽 발레를 일으켜 세우잖아요. 한국 발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순수예술에서도 한류가 가능하겠구나 그런 자신감이 생겨요.”
영국 로열 발레학교와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스무살부터 프로 무용수로 활동했던 문 단장은 러시아 키로프 극장에 선 최초의 동양인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지젤’은 그의 대표작이다. 키로프 극장에서도 연기했던 작품도 ‘지젤’이다. 그의 지젤 연기를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다. “신체적으로 제가 타고난 무용수는 아니에요. 다만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그 정도까지 한 거에요. 사실 전 무대보다 연습실을 더 좋아했어요. 무대에 서는 것보다 감정을 표현하고 춤추는 거 그자체를 즐겼으니까요. ”
2001년 발목부상으로 무용을 그만두고 2002년부터 경영에만 전념해 올해로 횟수로 10년째 경영자의 길을 걷고 있다. 밤낮 구분없이 일에 매달리는 워커홀릭이지만 직원들 사이에선 온화한 카리스마로 통한다. “숫자에 약해 매일 헷갈려하며 살아요.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정성이라고 봐요.무용수든,직원이든,CEO든 정성껏 꾸려가면 뭐든 되지 않을까요.”
/jins@fnnews.com최진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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