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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 가득한 佛메도크 와이너리를 가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1.07.11 17:44

수정 2011.07.11 17:44

【메독(프랑스)=유현희기자】 지난 2일(현지시간) 만난 프랑스 서부지역 보르도의 젖줄인 지롱드강은 따뜻한 햇살을 머금은 은빛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프랑스 대표 와이너리가 있는 메독 지방은 100여㎞에 이르는 지롱드강을 따라 펼쳐진다. 대서양과 만나는 지역까지 길게 늘어선 메독의 포도밭들에는 한국의 장마철을 비웃기라도 하듯 매일 강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강한 햇살에 이제 막 열매를 맺은 포도알들이 말라 죽는 것을 보는 것도 다반사. 그러나 이곳 와이너리 운영자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양조 과정 중 증발하는 일부의 포도주를 '천사의 몫'이라 일컫는 이들에게 자연이 선사한 테루아르(토양 및 기후)는 거스를 존재가 아닌 순응하고 조화를 꾀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한 와이너리의 최고경영자(CEO)는 "이렇게 일부가 말라 죽으면 나머지 포도알이 더 많은 영양분을 공급받게 된다"며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메독와인협회 초청으로 5일간 이어진 메독지방 와이너리 투어에서 소규모 와이너리인 크뤼 아르티장부터 메독지방 와이너리 중 가장 비중이 높은 크뤼 브루주아 그리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그랑크뤼급 와이너리까지 10여곳의 와이너리를 직접 둘러봤다.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메독

지롱드강을 따라 와이너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키작은 포도밭들은 이곳이 와인 주산지임을 실감케 한다. 포도밭 사이로 보이는 샤토(고성)들은 현재에 존재하지만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메독지방에는 8개의 아펠라시옹(AOC·지역)이 속해 있으며 포도밭 면적만 1만6500㏊(165㎢)에 달한다고 한다. 서울 여의도의 20배에 가까운 면적이 포도밭인 셈이니 가도가도 포도밭만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8개의 아펠라시옹은 메독, 오메독, 포이야크, 마고, 리스트락 메독, 생테스티프, 생쥘리엥, 물리스 등이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 그중에서도 메독 와인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5대 샤토라고 부르는 프랑스 대표 와인 중 4개가 메독에서 생산될 정도니 이들의 자부심이 괜한 너스레는 아닌 셈이다. 메독에서 생산된 와인 수출액은 5만유로에 이르며 연간 1억병 이상이 프랑스를 제외한 국가로 팔려 나간다. 메독지역에만 600개 샤토와 1500개 와인 브랜드가 있으니 보르도 와인의 대표 격이라는 수식어가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메독지역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프티베르도, 카베르네 프랑 등의 품종을 블렌딩한 와인을 주로 선보인다.

■장인정신이 깃든 와인 크뤼 아르티장

크뤼 아르티장에서 '크뤼'는 등급을, '아르티장'은 장인을 뜻한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장인이 만든 등급'이다. 이 등급은 다른 보르도 와인과 달리 1855년 나폴레옹의 지시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2006년 새롭게 공식 등급으로 인정받게 됐다. 사실 프랑스에서 크뤼 아르티장 등급을 받은 이들은 와인 생산뿐만 아니라 제빵사, 축산업자 등 와인 생산 외에 또 다른 직업을 지닌, 요즘으로 치면 '투잡스족'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몇 세대를 거치면서 와인 생산에만 집중하게 된 이들이다.

현재 메독지방에는 44개 크뤼 아르티장이 있으며 이들은 포도 재배면적이 10㏊ 미만으로 소규모인 경우가 많다. 워낙 생산량이 적기 때문이 이들이 만든 와인이 한국에까지 소개된 사례는 드물다. 그러나 이들 역시 숨겨진 보석 같은 와인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크뤼 아르티장인 오메독의 샤토 무트 블랑 와이너리는 프랑스 지역 와인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경력을 지녔다. 아쉽게도 한국에는 수출되지 않지만 연간 5000병가량의 생산량 중 가까운 일본과 중국에는 소개되고 있을 정도로 아시아권에까지 이름을 알리고 있다.

같은 등급인 샤토 클로 드 비고스도 3대에 걸쳐 와인을 생산해 왔다. 전통을 고집하는 장인답게 이곳에서는 전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사람 손으로 수확을 한다. 오크통을 막는 마개 역시 실리콘 재질 대신 과거 사용하던 유리잔 형태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이곳만의 특징이다. 유리마개는 오크통의 와인이 넘치면 유리마개를 열고 수시로 와인을 채워넣는 번거로움 때문에 최근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다.

▲ 샤토 몽브리종은 메독 와이너리의 40%를 차지하는 크뤼 브루주아 와이너리이다. 샤토 몽브리종은 제2차대전 이후 포도나무 간의 간격을 표준화해 메독에 새로운 재배문화를 열었다.(위 사진) 오크통에 숙성 중인 2010년 빈티지 와인들. 와인은 수확 후 14∼18개월가량 오크통 숙성을 거쳐 병입된다.(아래 사진)

■메독의 허리 '크뤼 부르주아'

포도원을 소유한 시민이라고 볼 수 있는 '크뤼 부르주아'는 메독 와인 생산량의 40%를 책임지고 있다. 이들은 세대를 거치며 가족경영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2008년 빈티지부터 매년 크뤼 부르주아 등급 명칭에 대한 사용심사를 진행 중이다. 그랑크뤼(1등급) 등이 수세기를 거치며 같은 등급을 이어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1921년부터 가족경영을 해 온 샤토 몽브리종의 소유주 로랑 본 데 헤이든은 전형적인 마고 와인을 생산한다. 마고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 비중이 가장 높은 것이 특징이며 메를로 품종의 사용비중도 높은 편이다. 자녀 중 둘이 와인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헤이든씨는 "메독의 역사는 이 테루아르부터 시작됐다"고 강조한다. 제2차대전 이후 프랑스의 포도밭이 모두 소실됐을 때 새로 포도나무를 심게 됐는데 그 첫해에 몽브리종의 테루아르에도 포도나무가 심어졌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포도밭 고랑 사이의 간격을 규격화하고 포도나무당 거리까지 균일하게 적용함으로써 최적의 재배환경을 구현해 냈다.

메독에서 가장 작은 아펠라시옹인 물리스에는 샤토 샤스 스플링 와인이 가장 유명하지만 이곳에서는 이보다 작은 규모의 크뤼 브루주아 와이너리인 레스타스 다르키에를 방문했다. 이곳은 잡초를 제거하지 않고 포도를 키우는데 잡초와 포도나무가 경쟁하면서 포도나무가 뿌리를 깊게 내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생테스티프의 투르데 테르메는 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고 리스트락메독의 샤토 사랑소 뒤프레는 전직 저널리스트가 경영을 맡고 있다. 사랑소 뒤프레의 이브 레이몽드는 파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메독으로 돌아왔다.

■메독의 자존심 그랑크뤼

1855년 나폴레옹이 프랑스 각 지역 대표 산물의 등급을 명하면서 마련된 보르도의 와인등급 중 최상위급인 그랑크뤼는 메독을 넘어 보르도의 자존심이다. 특히 메독에는 5대 샤토 중 샤토 오브리옹을 제외한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라피드로칠드, 샤토 마고, 샤토 라투르 등 나머지 4개 샤토가 위치해 있다.

그랑크뤼 등급은 또다시 5개 등급으로 나뉘는데 반드시 1등급이 5등급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다. 2등급이던 샤토무통로칠드가 1등급으로 격상됐던 것도 그 증거다.

포이야크에 위치한 샤토 피숑 롱그빌 콩데스 드 라랑드는 라랑드 백작부인의 가족이 운영해 온 와이너리다. 2007년부터는 샴페인 회사 루이 로델이 이곳을 운영 중이며 다른 포이야크 지방과 달리 카베르네 소비뇽 비중이 45%가량이다. 포이야크는 카베르네 소비뇽 비중이 60% 이상인 곳이 많다.

89㏊의 넓은 포도밭을 소유했지만 기계 대신 손으로 수확을 하고 일부 포도밭에서는 손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등 유기농법도 도입했다. 실제 백작부인이 거주했던 샤토도 예약을 한다면 방문할 수 있다.

생쥘리엥의 샤토 레오빌·랑구아 바르통도 역시 2등급 그랑크뤼로 최근 대부분의 와이너리들이 시멘트 양조통과 스테인레스 양조통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나무 양조통을 고집하고 있다. 이 와이너리는 레오빌 와이너리와 랑구빌 와이너리가 합병된 곳으로 2등급과 3등급이 동시에 생산되고 있다. 이곳의 방명록에서는 한국 기업들의 낯익은 방문 흔적도 볼 수 있었다.

사토 라투르 카르네는 세계적 위스키회사인 윌리엄 피터스가 소유한 곳으로 그랑크뤼 4등급에 해당한다. 오래된 고성은 1120년대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현재 리모델링이 한창이다. 윌리엄 피터스의 경영주인 베르나르 마그레가 소유한 이곳에서는 마그레가 소유한 35개 와이너리의 와인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국내에 알려진 샤토 린치 바주의 장 미셸 카즈 회장이 포이야크 지방에 옛 거리를 재현해 놓은 빌라즈드 바즈 마을은 린치 바주의 와이너리를 둘러보는 것 이상으로 이 지역의 과거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장이다.

장 미셸 카즈 회장은 "와인은 사치품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음식을 이해하게 해주는 매개체이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계"라고 말한다.
수확과 동시에 생산하기보다 기다림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와인의 매력 때문일까.

며칠째 가뭄이 이어지고 있는 메독의 태양은 뜨겁고 토양을 메말라가지만 21세기 최고의 빈티지로 평가받는 2010년산 와인이 오크통에서 영글어 가듯 2011년의 포도 수확도 2010년의 명성을 이어가리라 자부하는 이들. 이들의 자부심은 테루아르에만 의존한다기보다 전통을 중시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데서 비롯되는 듯하다.

/yhh1209@fnnews.com유현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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