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민주화 큰별'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타계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1.12.30 14:52

수정 2011.12.30 14:52

 민주화 운동의 '대부'인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타계했다.

 1970~1980년대에 수차례 수배와 투옥을 당할 만큼 정치개혁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왔던 김 상임고문은 말 그대로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재야 운동권에서는 독재 정권에 맞선 강렬한 민주 투사였고, 정치에 몸담는 동안에는 한없이 온화하고 올곧은 소신주의자였다.

1965년 서울대 입학 이후부터 민주화 운동에 투신, 옥고와 수배를 넘나드는 긴 수배생활 속에서 운동권의 리더격이었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고문기술자들의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20여일간 여덟 차례의 전기고문과 두 차례 물고문으로 매년 고문을 받던 시기인 초가을만 되면 한 달 가량 몸살을 앓았다.
고문 후유증은 파킨슨병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당시 고문을 받으면서도 악질 수사관들의 별칭과 악몽 같은 각종 고문 행위 등을 소상히 기억해 둬 후에 책으로 펴내 당시 정권의 고문 폭압정치를 고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에 그를 고문한 고문기술자 이근안씨가 수감되자 2005년에는 수감 중인 이씨를 찾아가 '역사적 용서'를 했다.

 그는 1994년 제도권 정치에 진입, 민주자유당에 반대하는 민주연합정당의 전신인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다음해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치적 소신을 함께하며 본격적인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에드워드 케네디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 고문의 사면복권을 요청해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2004년 17대 총선까지 내리 3선 배지를 달았고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성품으로 주변 지인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한몸에 받았다. 이러한 인품 때문에 신사다운 국회의원을 선정하는 '백봉신사상'에 7년 연속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여정은 그다지 화려하지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그룹인 동교동계의 견제에 밀려 주요 당직을 맡지 못했다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탄생 이후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탄핵 후폭풍으로 긍정적 기제로 작용하면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 당의 중심으로 서게 됐다. 이때 그를 따르는 후배 정치인들과 재야 인사, 486운동권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그의 이니셜을 딴 'GT계'가 형성됐다.


 그는 이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 행정경험을 쌓은 데 이어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때 범여권 대통합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대선 불출마라는 쉽지 않은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고비 때마다 실리를 좇기보다는 자기를 버리고 내려놓는 '자기 희생'으로 당 안팎의 귀감이 됐다.


 이날 여야 각 정당과 정치권 인사들은 공식 논평, 개인 트위터 등을 통해 그의 생애 민주화 업적을 기리는 한편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정치권 및 일반 국민의 발길이 이어지며 그를 추모했다.

haeneni@fnnews.com 정인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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