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중소기업

그림자배심원이 지켜본 국민참여재판

김승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2.02.08 16:06

수정 2012.02.08 16:06

지난 3일 오전 11시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 한 20대 중반 남성 피고인이 고개를 떨구고 들어온다. 순간 법정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1심에서 강도상해죄가 적용돼 7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얼굴로 보기엔 너무 앳돼보였기 때문이다.

피고인인 25세 남성 A씨는 지난해 11월 서울 논현동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지나가던 여성 B씨의 핸드백을 빼앗기 위해 몸싸움을 하다가 피해여성이 쓰러져 다쳤고 이 과정에서 강제 추행까지 했다. 달아나던 A씨는 30여분 뒤 또다시 인근을 지나는 여성 C씨를 추행하려다 시민들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A씨는 자신의 범죄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진술했다.

2심 공판이 펼쳐진 이날엔 판사들 외에도 7명의 국민참여재판 배심원과 42명의 그림자 배심원들이 판결 과정을 함께 지켜봤다. 배심원들도 양형에 대한 평의 및 평결을 통해 재판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게 된다.


"사법부 판결에 대해 불만을 갖는 국민들이 많다. 하지만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해보면 배심원과 재판부 판결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재판시작에 앞서 서울중앙지법 성낙송 형사수석부장판사가 배심원들에게 국민참여재판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피고인의 인생에 귀를 기울이면 적절한 형량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논리에 앞서 가슴으로 재판을 지켜볼 것을 당부했다. 또 재판장으로 나선 정명훈 판사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흔들리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날 쟁점은 팔꿈치 찰과상 등 경미한 부상을 상해로 볼 것이냐와 술에 취해 저지른 범죄를 '심신미약'으로 보고 감형을 할 것인지였다. 1심과 마찬가지로 상해 혐의가 그대로 인정되면 피고인은 강도상해죄의 양형기준 법정형인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따라 7년을 복역해야 한다. 하지만 상해가 아닌 '강도미수죄'가 적용된다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이 적용돼 양형을 줄일 수 있다. 여기에 범죄 당시 피고인의 심신미약 상태까지 인정된다면 형기는 더욱 줄어들게 된다.

공판은 오후 내내 이어졌다. 검찰과 변호인은 A씨가 벌인 강도상해와 강제추행 혐의를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쟁점대로 사건 당일 입은 상해를 과연 법적 상해 수준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와 술을 마시고 저지른 범죄를 '심신미약' 상태로 볼 수 있는지를 두고 날선 언쟁이 오고간 것이다.

재판부에 속한 배심원단은 종종 판사에게 요청해 증인과 피고인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림자 배심원단은 재판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 재판이 끝나고 배심원단은 평의와 평결을, 3개조로 나뉜 42명의 그림자 배심원단은 모의평의와 평결을 각각 내렸다.

오전에 시작한 공판은 오후 7시가 넘어서야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배심원단은 강도상해를 무죄로 판단해 강도미수죄에 대해 집행유예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강도상해를 유죄로 인정했다. 다만 심신미약을 인정해 집행유예형과 보호감찰형을 함께 선고했다. 재판부는 그림자 배심원단 3개조의 모의 평의 결과도 경청했다.

드디어 최종 선고가 내려졌다. 재판부는 A씨에 대해 "경미한 부상이라 할지라도 상해는 규범적으로 따져야 한다"며 강도상해를 인정한 동시에 심신미약에 대한 감형도 인정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보호관찰 2년과 알코올 치료 40시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최종적으로 배심원단과 다른 판단을 한 것이다.

담당판사는 "보통 국민참여재판의 경우 배심원단 판결과 재판부의 판결이 90% 이상 일치했는데 오늘은 조금 달라서 놀랐다"고 전했다. 그러나 변호인측은 "국민참여재판인 만큼 배심원단에 초점을 맞춰 준비했고 결국 배심원단 설득엔 성공했지만 배심원단 판결에 구속력이 없어서 아쉬웠다"고 표했다.

이날 배심원단으로 참여한 일반인들은 대체로 국민참여재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중앙대 로스쿨 재학생 양은영씨는 "사법부가 피고인, 배심원, 피해자 등 재판 당사자를 배려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이를 통해 공판중심주의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학생들과 함께 참관 온 유운식 교사도 "최근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국민참여재판은 사법부의 신뢰를 키울 수 있는 방안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면서 "사법권력은 국민의 견제가 없어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국민의 견제가 일부분 반영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2008년 1월 시작된 국민참여재판은 올해로 시행 5년째를 맞고 있다. 시행 첫 해엔 64건만이 관련 제도를 통해 최종 판결이 내려졌지만 지난해엔 253건으로 크게 늘었다. 대법원 조원경 공보판사는 "국민이 직접 판결해봄으로써 재판부와 국민의 판단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려 의심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국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되면 비리나 뇌물수수 등 다양하고 국민적 관심이 큰 재판으로 국민참여재판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날 참석자들 사이에선 아쉬운 부분도 지적됐다. 법정에서 만난 한 배심원은 "재판부가 배심원과 일반인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다른 참가자는 "국민참여재판이 피고인의 권리를 찾아주기보다는 재판부의 보여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bada@fnnews.com 김승호기자

김유진 박지현 박지훈 손영민 조지민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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