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8대 왕 예종(睿宗)은 열 아홉에 요절한 비운의 임금이다. 그의 죽음을 놓고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다. 재위 1년 남짓 만에 혈기왕성하던 10대 청년이 갑자기 죽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예종의 아버지는 세조다. 세조는 평생 '조카(단종)를 죽인 삼촌'이라는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성삼문 등 사육신은 죽을 때까지 세조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조카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세조는 공신을 양산했다.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이 대표적이다. 정통성이 희박했던 세조는 공신과 권력을 분점했다.
예종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에겐 아버지의 트라우마도 정통성 시비도 없었다. 18세에 즉위한 예종은 개혁의 초점을 크게 세 군데에 맞췄다. 첫째가 분경 금지다. 분경(奔競)은 관직 매매를 말한다. 예종은 세도가의 집에 사람을 보내 누가 그 집에 드나드는지 파악하도록 했다. 신숙주의 집에 부하를 보내 표피(豹皮)를 전달한 함길도 관찰사 박서창이 시범 케이스로 걸렸다. 예종은 박서창을 체포해 국문하고 관직을 박탈했다.
공신들을 더 쫄게 만든 것은 세금 대납권 금지다. 세금을 대신 선납한 뒤 백성에게 징수하는 것이 대납권이다. 이때 적어도 두 배를 징수했고 보통 서너배를 받아갔다. 걸리면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형에 처할 것이라는 예종의 경고에 백성들은 환호했고 공신들은 이를 갈았다.
예종은 면죄권에도 손을 댔다. 세조는 공신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웬만하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종은 양민을 억압해 천민으로 만든 자는 공신이든 종친이든 모두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예종의 개혁 의지는 가상했으나 힘이 부쳤다. 그는 적을 너무 쉽게 봤다.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적인 세력판도를 무시했다. 스무살도 안 된 애송이 임금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기득권자들의 반격은 무서웠다.
재위 1년(1469년) 11월 초 분경을 감시하라고 보낸 사헌부 관리가 정인지의 종과 몸싸움을 벌인 일이 있었다. 같은 달 하순 예종이 급사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을까? 천만에. 조정은 일사불란하게 차기 임금(자을산군·성종)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권좌에 오른 자을산군은 권신 중의 권신인 한명회의 사위였다. "자을산군은 이미 부름을 받고 대궐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게 성종실록의 기록이다. 그때 자을산군은 13세 미성년이었다. 권력은 다시 공신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젊고 멀쩡하던 예종이 급사하자 어의(御醫)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잠깐 있었다. 그러나 어의 권찬은 오히려 승진했다. 여기서 독살설이 굳어진다.
역사학자 이덕일이 쓴 '조선왕을 말하다' 중 예종편을 읽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두 사람은 의욕 과잉·역량 부족으로 개혁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닮았다. 안타깝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자서전 '운명'에서 진보의 역량 부족을 자성한다. "지금 집권을 말하기 전에 진보·개혁진영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정권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았을 때,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빈틈없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문 이사장뿐일까. 오로지 반MB 정서와 노풍(盧風)의 추억에 기대 정권 탈환을 노리는 이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대책 없이 무한복지를 떠벌리는 포퓰리스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정략의 도구로 삼는 국수주의자가 지금 내 눈에 비친 진보 캠프의 모습이다. 5년이 흘렀지만 진보의 역량은 진보하지 않았다. 서울 강남 유권자들의 적개심을 북돋는 박원순 시장의 실험은 아마추어의 티를 벗지 못했다.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기를 각오해야만 국민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 " 역작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의 말이다. 2000년 전 로마제국엔 지옥에 떨어지기를 각오한 지도자들이 많았다. 21세기 한국엔 천국에 가려고 기를 쓰는 지도자들만 득실거린다. 그것도 남의 주머니를 털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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