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독일 작가 그림 형제의 동화 '백설 공주'는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 현대 여성들에겐 '공공의 적' 같은 스토리다. 눈같이 하얀 피부에 날 때부터 빼어난 미모로 왕과 만백성의 사랑을 받는 공주의 출생 배경부터 마뜩잖다. 물론 태어나자마자 생모를 잃어 계모 슬하에서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내고, 심지어 10대 후반엔 독살 위협까지 받는다는 점에선 만만찮은 인생이다. 하지만 나이 스무살도 안돼 백마 탄 왕자를 만나 그의 키스 하나로 "그 후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 해피엔딩 동화 속 공주는 맹렬 현대 여성들에겐 맥빠지는 여인일 수밖에.
영화 '백설공주'는 이 동화 속 백설공주의 스타일을 보란 듯 뒤집어 놓는다. 공주의 태생은 물론 같다. 끔찍히도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 왕이 있고, 그 사랑으로 온실속 공주로 성장하는 것까지는 골격이 같다. 공주의 변신은 열여덟살부터다. 절벽 끝, 찬란한 위용을 자랑하는 세고비아 성을 나와 백성들의 처참한 삶을 목격하면서 분노를 키우고, 결국 독재자 여왕과 맞서기로 결심한 공주는 더이상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는 나약한 여인이 아니다. 키의 5∼6배는 됨직한 스프링 달린 발로 가짜 거인 행세를 하며 도둑질을 일삼는 일곱 난쟁이, 근사하지만 어리버리한 발렌시아 왕국의 앤드류 왕자는 공주의 '거사'를 돕는 조력자다.
사치와 허영으로 왕국을 파산 직전까지 몰고간 여왕은 카리스마 넘치는 악녀의 기운을 내뿜는다. 백발에 사과 바구니 옆에 끼고 난장이 집을 기웃거리던 구부정한 노파의 이미지는 없다. 물론 싸움에서 진 여왕은 쭈글쭈글한 노인으로 변해 공주에게 빨간 사과를 들이밀긴한다.하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상태. 행복을 제 힘으로 쟁취한 공주가 빨간 입술을 씰룩거리며 일침을 날린다. "이제, 결과를 받아들이셔야죠."
발랄하면서도 의연한 공주 역을 맡은 릴리 콜린스도 인기를 끌만하지만 스크린을 가득 채운 건 역시 여왕 역의 줄리아 로버츠다. 코믹하면서도 음흉한 여왕을 현란한 연기로 소화해냈다. 로맨틱 코미디의 강자 줄리아 로버츠의 생애 첫 악역이 최고 볼거리로 꼽을만하다.
뻔한 동화가 현대적 시각으로 새롭게 포장되긴 했지만,허를 찌르는 통쾌함은 약하다. 착하고 아름답기만 했던 공주가 혁명 투사의 면모를 갖춘 멋쟁이 현대 여성으로 변신한 구도가 그다지 놀랍지도, 특별하지도 않다는 점에선 시시한 버전일 수도 있겠다. 대신 가볍게 즐기기엔 부담없는 할리우드 판타지 어드벤처 영화. 5월3일 개봉.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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