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옮겨온 전학생 정도? 행덕이가 사수예요. 그런데 이 녀석이 너무 부려먹어요." "전 후다닥하는 스타일입니다. 승재 형은 참았다가 돌아가고요. 그러니까 서로 잘 맞아요."
형은 한국영화 르네상스기를 이끌었던 차승재 한국영화제작가협회장(52), 아우는 대학로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악어컴퍼니 조행덕 대표(46)다. 10여년 전 연극 뒤풀이가 한창이던 대학로 허름한 주점에서 술잔을 부딪친 게 첫 인연이다. 그 뒤 형이 만든 영화 '싱글즈'를 아우는 대학로에서 뮤지컬로 흥행시켰고, 아우의 연극 '날 보러와요'는 형의 손을 거쳐 '살인의 추억'으로 스크린을 휘저었다. "행덕이가 하는 일이면 그냥 믿어요." "형은 제 멘토 중 1인자예요." 형과 아우는 마주보며 와락 웃음을 쏟는다.
두 사람이 이번엔 한 작품에 올인한다. 1983년 미국 브로드웨이 초연 후 롱런 중인 뮤지컬 '라카지' 국내 첫 상륙을 이 두 사람이 주도하고 있다. '라카지'는 1973년 프랑스 극작가 장 프와레의 연극 '라 카지오폴'이 원작이다. 동성애 부모를 둔 남자, 보수적인 집안의 여자, 이 두 집안 사람들이 펼치는 결혼 소동이 큰 줄거리다. 양가 부모의 상견례 장소인 클럽 라카지오폴은 현란한 쇼, 화려한 패션으로 관객들의 혼을 빼놓는다. 조행덕·차승재가 공동 프로듀싱하는 국내 공연은 오는 7월 4일부터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두 달간 펼쳐진다.
조 대표는 4년 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이 작품을 처음 봤다. "곧바로 뭉클한 게 왔어요. 화려한 쇼를 앞세우면서도 유머가 넘치고 그 사이 휴머니티가 치고 들어옵니다. 엿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작품이에요. 일상과 떨어진 세상 같지만 금세 그 안으로 빨려들게 됩니다. 잔상이 오래 남았어요."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라카지는 내가 찜한 작품이니 손대지 마세요"라고 못박았다. "그래서 좋은 조건으로 계약했어요. 로열티 낮춰서 제작비에 보탰습니다." 지난해 여름 계약을 끝내고 연말 출연진과 스태프를 꾸렸다. 이지나 연출, 장소영 음악감독, 배우 정성화·남경주 등 실력파들이 척척 합류했다.
"형, 이번엔 같이 해봅시다." 조 대표의 이 한마디에 차 회장은 덥석 손을 잡았다. 그에겐 이 작품이 뮤지컬 프로듀서 입봉작이다. 우노필름, 싸이더스FNH 대표 등을 지내며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살인의 추억' '타짜' 등 숱한 화제작을 만든 충무로 대표 흥행사의 뮤지컬계 진출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영화든, 음반이든, 뮤지컬이든 결국 핵심은 이야기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예요. 대중에게 이게 맞을까, 안 맞을까 제일 먼저 판별하는 사람은 프로듀서고요. 장르별로 프로세스가 다르겠죠. 전 이제 뮤지컬 공정을 배우는 중입니다. 외국엔 삶을 풍부하게 산 프로듀서들이 많아요."
그는 "이제 창작뮤지컬로 시장을 키울 때가 왔다"고도 했다. "국내 뮤지컬을 보면 해를 거듭할수록 완성도가 축적되고 있어요. 그런데 흥행작 대부분이 라이선스 작품이에요. 창작물이 많이 나와야 제대로 된 시장이 완성됩니다.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창작물이 3∼4개가 걸려야 해요. 한국 뮤지컬이 거품이 끼어있는 과도기 시장이긴 하지만, 다시 큰 물결이 일 거라고 봅니다. 그걸 주도하는 건 창작물일 겁니다."
주로 대학로 소극장 무대를 공략해온 조 대표는 이번 '라카지'로 대극장 입성을 시도한다. 18년 전 300만원을 들고 직원 두 명과 악어기획(악어컴퍼니 전신) 간판을 올린 게 그의 '기획 인생' 시작이다. 뮤지컬 '스페셜 레터' '싱글즈', 연극 '클로져' '거미여인의 키스' 등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작품 스케일이 크진 않았다. "이젠 대작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조 대표는 현재 준비 중인 창작뮤지컬 다섯 편 중 한 편은 총제작비가 400억원(해외투어 포함) 규모라고 귀띔했다.
조 대표의 과감한 뮤지컬 행보에 차 회장도 동행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철학, 정서, 이데올로기를 믿는다. "제작자로서 체면은 잃지 않고 살아왔어요. 불량식품은 안 만듭니다. 돈 때문에 일한 적은 있지만 나쁜 걸 만들지는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우린 비슷해요." 형과 아우가 동시에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웃었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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