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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인칼럼] 아, 외암마을 '영암댁'/김남인 논설위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2.06.05 17:05

수정 2012.06.05 17:05

[김남인칼럼] 아, 외암마을 '영암댁'/김남인 논설위원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외암민속마을은 예안 이씨 집성촌이다. 현재 65가구, 200여명 주민 중 대부분이 예안 이씨로 흔치 않은 씨족 공동체 마을이다. 집집마다 '참봉댁' '감찰댁' '송화댁' '신창댁' 등 집주인의 관직이나 출신지명을 붙인 집이름을 널판지에 써 문패처럼 걸었다. 재물보다는 학문을 영예롭게 여겼던 조선시대 고유의 전통마을이다. 그래서 이 마을을 둘러보면 자연스럽게 선비문화에 흠뻑 빠진다.


참판이 나왔다는 '참판댁'과 건재고택인 '영암댁'은 이 마을을 대표하는 전통가옥이다. 참판댁은 솟을대문부터가 전형적인 사대부집 구조지만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으로 빚은 '연잎주'가 유명하다. 요즘이 한창 연잎주를 담그는 시기인데 마을 인근에서 직접 재배한 연잎을 사용한다. 애주가라면 툇마루에 앉아 가벼운 안주로 답사 길의 목을 축일 수 있다.

영암댁은 이 마을 입향조인 외암 이간(1667~1727)이 태어났고 6대손인 건재 이상익(1848~1897)이 지금의 형태로 증축했다. 건재가 영암군수를 지내 '영암댁'이라고 한다. 외암은 율곡 이이→사계 김장생→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의 뒤를 잇는 성리학자이자 기호사림의 거두다. 외암마을은 그의 호를 따 지었다.

영암댁은 전체 면적 5714㎡(1730평)에 이르는 대저택이다. 집 안에는 수령 수백년쯤 되는 괴목을 포함해 400여 그루의 나무와 어울려 있는 후원과 연못을 갖춘 정원이 좋은 볼거리다. 연못은 학 모양이다. 대부분의 연못이 사각형에 원형의 섬을 만든 것과는 다르다. 이 연못은 인공수로를 통해 마을 뒷산인 설화산 계곡물과 연결돼 있다. 영암댁뿐만 아니라 이 마을은 집집마다 물이 흐르도록 인공수로를 냈다. 이 물은 생활용수이면서 방화수다.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이 형성된 만큼 한 집에서 불이 나면 삽시간에 마을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비책이다.

영암댁에 걸려 있는 현판과 편액, 기둥글(주련)등은 또다른 볼거리다.이 중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무량수각 无量壽閣'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 추사가 첫 부인과 사별한 후 예안 이씨를 두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인 인연으로 처가 동네에 써 준 글씨다. 외암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것으로 추정되는 '외암서사 巍巖書社'도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는 명필이다.

외암마을 집들은 항상 대문이 열려 있어 누구든지 집안을 구경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영암댁은 '공사중' 팻말에 엄중한 보안장치까지 더해져 문이 굳게 잠겨 버렸다. 불법대출과 배임·횡령 혐의로 구속된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이 집을 사들인 이후 생긴 변고다. 그가 새 주인이 되면서 대문을 걸어 닫고 별장처럼 사용해 집안을 구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난 주말에도 방문했으나 활짝 핀 장미와 수국만이 담너머로 보일 뿐 집구경은 헛걸음을 했다.

영암댁은 외암이 학문연마와 제자양성에 심혈을 쏟은 성리학의 산실이다. 외암의 인품과 덕망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다. 영암댁 주인을 자처하고 나선 김 회장은 이런저런 지인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술 접대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시·문·서·화를 즐기던 영암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행태다.

엊그제(4일)로 예정됐던 영암댁 2차 경매가 연기됐다고 한다. 예안 이씨 종중에서 추사가 쓴 현판 등 유물에 대해 별도의 소유권을 새롭게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영암댁은 채권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낙찰자가 나오기 쉽지 않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헐값에 다시 김 회장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제 영암댁은 외암의 정신을 살리고 기릴 수 있는 새 주인에게 돌아 가야 한다. 예안 이씨 후손이나 마을보존회가 제격이다. 하지만 2차 경매가격만도 33억원에 달해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정부가 사들이는것도 한 방법이다. 문화재적 가치로 쳐도 영암댁은 정부가 책임지고 보존하기에 충분하다.
영암댁 대문이 닫혀 있는 한 외암마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연간 30여만명이나 찾는 외암마을이 이름없는 시골마을로 전락하게 내버려 둬선 안된다.

ink548@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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