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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직지가 구텐베르크 성경 이기려면/김용근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2.06.20 17:54

수정 2012.06.20 17:54

[fn논단] 직지가 구텐베르크 성경 이기려면/김용근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

인쇄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8~1468년)는 부친이 독일 마인츠의 대주교 밑에서 주화를 제조하는 금속 세공관리이자 의류상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금속을 다루는 기술과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의 가족이 1430년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거주하는 기간에 구텐베르크는 금속 세공과 인쇄 기술에 대한 연구와 작업에 진전을 이뤘고 1448년 마인츠로 돌아와 주변에서 자금을 빌려 본격적인 인쇄 사업을 추진했다.

구텐베르크의 세상을 바꾼 발명품은 바로 최초의 금속으로 된 가동활자(movable type)이다. 그의 인쇄기술은 글자 패턴을 패트릭스(patrix)라는 작은 철봉 위에 새긴 다음 이를 구리와 같이 보다 유연한 금속에 망치로 두들겨 눌러 매트릭스(matrix)라는 주형을 만든다. 그 다음 손으로 만든 모래 거푸집 안에 여러 개의 매트릭스를 묶어 틀을 만들고 여기에 주로 납과 주석, 안티몬의 합금으로 된 녹은 금속 물을 부어 주물과정을 거침으로써 여러 개의 활자가 동시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주물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 동일한 활자가 대량 생산된다. 이러한 활자 제작 기술과 함께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에 잘 부착돼 번지지 않는 흑연 성분의 유성잉크도 발명했고 당시 포도즙을 짜내는 와인용 스크루 프레스를 응용해 압축 인쇄기도 만들어 냄으로써 인쇄 기술을 종합적으로 완성했다.

'구텐베르크 바이블'로 불리는 구텐베르크의 최고 인쇄작품은 1455년의 42행 성서다. 약 160~180권이 만들어졌는데 권당 가격이 당시 일반 사무직원의 3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30플로린이었으나 손으로 직접 쓴 성서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책의 재질로는 송아지 가죽과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종이가 사용됐다.

이러한 성서의 대량 인쇄는 성직자와 지식인에 한정된 성서를 일반 대중화할 수 있게 했으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능하게 했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작품들도 대량 인쇄, 보급되면서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됐으며 대중 매체인 신문이 탄생하는 토대도 만들었다. 이와 같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기술과 인간, 사회, 예술이 결합돼 세상을 바꿔 나가는 대표적 사례가 되고 있다.

금속 이동활자 인쇄기술은 우리나라가 더 먼저 앞서 있었다. 동국이상국집에 1234년 고려 고종 때 주자본으로 된 '고금상정예문' 28부가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어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추정되며 1377년 충북 청주의 흥덕사에서 발간한 '직지심체요절(직지)'이라는 불교서적은 현존하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쇄서적이 되고 있다. 상·하 2권 중 현재 하권만 남아있다.

직지는 두 스님이 한 여성신도의 물자와 경비지원을 받아 금속활자를 연구해 만든 것으로 너도밤나무 판에 붓으로 글자를 써서 새긴 후 밀랍이나 모래, 진흙에 눌러 주형을 만들고 여기에 청동 물을 부어 활자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발전돼 있던 종이나 동상, 주화 등 제작에 사용된 청동기술과 질기고 하얀 종이 제조기술, 인쇄용 기름먹 제조기술들이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직지 인쇄는 기술적인 한계로 활자 크기나 글자 모양이 고르지 못했고 수천자로 이루어진 한자체계를 따르다 보니 활자를 생산하는데도 노동력이 많이 투입되고 활자의 대량생산도 어려웠다. 또한 지배적인 유교문화로 인해 일반 대중에 대한 보급이 허용되지 않고 수요자가 승려 등 소수 전문 지식층과 관료집단에 한정되게 됐다.

이로 인해 금속 활자본이 발간된 1년 후인 1378년 경기 여주 인근 취암사에서 직지 목판본이 발간되기도 했다.

우리는 직지라는 남보다 앞선 기술 작품을 만들었음에도 다른 연관 기술과 사회적 시스템이 뒷받침 되지 못함으로써 80년이나 뒤에 나온 구텐베르크 성경에 세상을 바꾸는 세계사적 공로를 넘기고 역사적 자긍심에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됐다.

따라서 세계 최고의 과학적 문자체계인 한글을 만든 것과 같은 우수한 창의성을 바탕으로 해 이제부터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꾀하는 테크플러스적인 혁신을 도모해 나간다면 분명히 모든 산업분야에서 세상을 바꿔 가는데 앞서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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