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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의 워싱턴 프리즘] 보스턴 테러 이후의 미국

박경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4.23 16:35

수정 2013.04.23 16:35

[노동일의 워싱턴 프리즘] 보스턴 테러 이후의 미국

제임스 오티스 2세는 영국 식민지 보스턴의 유명한 변호사였다. 영국 왕에 의해 식민지 고위직에 임명됐던 그는 어느 날 그 직을 사직하고 영국을 대적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당시 영국 군대는 일종의 일반영장(writ of assistance)에 의해 식민지인 누구라도 또 어느 곳이라도 압수·수색 등을 할 수 있었다. 1761년 오티스는 영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러한 초법적 조치의 부당성을 설파했다. 얼마나 감명 깊은 명 변론이었던지 이를 지켜본 존 애덤스는 "그때 그곳에서 미국 독립의 아이가 탄생했다"는 후일담을 기록하기도 했다. 독립전쟁의 계기가 된 1773년의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이전, 영국 정부의 자의적 영장집행에 항의하는 것으로부터 미국 독립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보스턴 마라톤이 열리는 4월 셋째 월요일 '애국자의 날'도 보스턴 인근의 콩코드와 렉싱턴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된 1775년 4월 19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보스턴은 미국인들에게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9·11 테러가 뉴욕 자유무역 센터와 워싱턴 인근 펜타곤 등 미국의 심장부를 노렸다면 보스턴 마라톤 테러는 미국인들의 심리적 정서에 타격을 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미국 언론이 텍사스 주 폭발사건은 외면한 반면 보스턴 테러 사건은 실시간 생중계를 하느라 추측성 오보를 남발하면서 과잉 보도 논란을 부를 정도였다. 9·11 테러가 충격을 주었다면 보스턴 테러는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하는 어떤 시민의 반응이 두 사건을 대하는 미국인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까.

어쨌든 테러 용의자인 차르나예프 형제 중 형은 죽고 동생은 체포됨으로써 사건 자체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왜 두 젊은이가 테러를 저질렀는지 전모를 밝히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체첸 반군과 연계된 것인지, 알 카에다 등의 사주를 받은 것인지, 이슬람 극단주의에 스스로 심취된 것인지, 아니면 미국에 적응하지 못한 이민자의 박탈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직은 확실치 않다. 체포된 조하르가 재판에 넘겨지더라도 모든 게 확정되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그때까지 예단은 금물이다. 이슬람을 배후로 지목하는 것이나, 미국의 세계 전략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는 것이나 모두 단순화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더 차분하게, 더욱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를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보스턴 테러 이후의 미국 사회가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미국 독립의 시발점이 된 국가와 개인의 시민적 자유의 관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또 한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 작고한 언론인 윌리엄 새파이어는 9·11 테러 후 2001년 12월 뉴욕 타임스 칼럼을 통해 테러 위협을 이유로 정부가 개인을 철저히 통제하는 사회가 도래할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2001년 패트리엇 법(PATRIOT Act), 2006년 군사위원회법, 2012년 국가안보수권법 등이 잇달아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위험은 실제화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들 법은 대통령(정부)이 테러위협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하면 영장 없는 압수·수색은 물론 관련자 체포 후 무기한 구금까지 가능하게 하는 등 가공할 만한 권한을 행정부에 부여한 것이다. 보스턴 테러범 추격 과정은 탱크가 동원되고 도시 전체가 마비되는 등 전시를 방불케 하는 상황을 연출한 바 있다. 9·11 테러 이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다. 이런 일상에 이미 적응한 미국 사회를 보스턴 테러는 다시 한 번 위축시킬 것이다. 이미 존 매케인 등 강경파 의원들은 체포된 조하르에게 헌법상 보장된 미란다 권리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립전쟁으로부터 치면 238년, 제임스 오티스로부터 치면 252년 동안 미국의 역사는 시민자유(civil liberty)를 확대하는 과정을 꾸준히 거쳐 왔다.

노예제, 흑백 차별, 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굴곡도 있었지만 크게 보면 개인의 자유와 인권에 관해 세계의 모범이 되는 나라였다. 우리 역시 인권문제는 늘 미국이 기준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역사가 시작된 보스턴이 미국의 인권에 관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는 장소가 된 듯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동일 경희대 교수·美시러큐스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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