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판사들, 재판 스트레스에 우울증상까지... 하지만 “어떻게 정신과를..”

남형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5.02 17:00

수정 2014.11.06 16:02

판사들, 재판 스트레스에 우울증상까지... 하지만 “어떻게 정신과를..”


#1. 지난 2010년 8월 대구시내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대구지방법원 A부장판사의 시신이 발견됐다. 사망 원인은 추락사. 경찰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했다. 신병을 비관하는 유서와 함께 옥상 난간에서 그의 신발자국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그는 숨지기 한 달 전에도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고 우울증 치료를 위해 1년간 휴직하기도 했다. 숨지기 1년 전 그는 다니던 교회 홈페이지에 '판사들의 애환과 직업병'이라는 글을 올려 판사들이 적지 않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렸다.그는 "세상 사람들의 토사물이나 배설물을 치우는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판사"라며 자괴감을 토로했다.

#2. 지난 1월 지병으로 세상을 뜬 서울중앙지법 B부장판사는 법조계에서는 '우울증 극복 희망 전도사'로 불렸다. 그는 주식투자 실패와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로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했다.

대학병원에 입원하며 치료에 매진한 끝에 우울증을 극복한 그는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동료법관과 직원들에게 상담하며 희망을 키웠다. 하지만 그가 '급성 백혈병'으로 숨지자 법원 안팎에서는 "스트레스와 우울증상이 백혈병의 원인일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2011년 2월에 숨진 법원행정처 재판사무국 소속 C참여관도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린 경우다. 그는 대법관을 보좌하는 재판사무국으로 전보된 지 한 달여 만에 자택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고위직 판사를 비롯한 법원 공무원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 등으로 목숨을 잃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재판업무의 특성상 공정한 재판에 대한 압박감이 스트레스로 이어지는 데다 업무량도 갈수록 늘어 업무 강도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공정한 판결' 압박감 상상 초월

2일 상당수의 법조계 관계자들은 법관과 법원공무원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은 "재판의 특성"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수도권 법원의 한 중견판사는 "재판은 거짓말의 경연장"이라면서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칫 당사자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서 소개한 A부장판사도 "판사는 의심을 해야 하는 직업인데 그러다 보니 아내와 부모님의 말마저 의심하게 된다"면서 "판사는 참 끔찍한 직업"이라는 말을 자신이 다니던 교회 홈페이지에 남겼다. 그는 "진실은 당사자가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왜 판사에게 판단해 달라고 하는지…"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서울지역의 또 다른 판사는 "일부 과격한 시민단체 중에는 재판에 불만을 품고 협박전화를 하기도 한다"면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넘기려 하지만 그래도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판사출신 한 중견 변호사는 '오원춘 사건'을 예로 들며 "살인·성폭력 사건 등 흉악사건들이 법관들의 정신건강을 위협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잔인한 범행수법과 끔찍한 증거물들이 판사 앞에 놓이게 된다"면서 "그것들을 세세히 분석해 판단해야 하는데 판사도 사람인지라 동요하지 않을 수 없다. 재판이 끝나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끔찍한 장면이 떠나지 않는다"라고 토로했다.

■업무과중도 한몫

과중한 업무도 법관들의 스트레스 및 우울증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의정부지법 소속의 한 법원 공무원은 결혼을 앞두고 미리 업무를 처리하려다 과로가 겹쳐 뇌출혈로 숨졌다.

법원노조 관계자는 "전 대법원장 시절 도입한 공판중심주의와 집중심리주의로 법관은 물론 법원 공무원들의 업무량이 크게 늘었다"며 "이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책을 요구했지만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법원 고위 관계자는 "업무량 감축과 인력증원 등의 대책과 함께 정신과 상담을 받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정신과 진료를 받는 판사가 재판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정신과 전문의 등 의료 전문가들은 "우울증상을 질병의 하나로 인식하고 치료를 받기보다 사법부의 권위와 신뢰에 누를 끼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주저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편 법원노조에 따르면 지난 2010년 이후 최근까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법원 공무원은 모두 15명이다. 올해에만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배경은 우울증상이 주요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1년 법원 노조가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한 '법원공무원 업무환경 및 건강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 3004명 중 중등도 이상의 우울 증상을 보인 법원공무원이 29.1%에 달한다.
이는 사무금융노동자(26.5%)나 서비스 노동자(26.6%)보다 높고 일반인(15.2%)의 두 배에 달한다.

ohngbear@fnnews.com 장용진 조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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