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제=장용진 기자 고민서 수습기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1951년 6월 강원도 인제. 해병대 1연대(당시 연대장 김대식 대령)는 도솔산 부근에서 북한군 2개 사단과 격돌했다. 북한군은 중공군으로부터 병력과 물자, 탄약을 보급받아 완편된 상황에서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 24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남측은 병력과 물자, 화력은 물론 지형에서도 불리한 처지였던 만큼 고전이 예상됐다. 앞서 미 해병 1사단 5연대가 압도적인 공중전력과 화력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탈환에 실패한 상황이어서 아무도 우리 해병대 1연대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해병대 1연대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17일 만에 적 수중의 고지를 모두 탈환했다. 사살된 적은 2300명이 넘었고 노획된 적 장비는 700여점에 달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133명이 전사했다. 해병대 장병들은 전우들의 시신을 참호 부근에 묻으며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찾아 고향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60여년이 흘렀다.
■60년 전 약속 후배 장병이 지킨다
국방부 유해발굴단은 지난 4월부터 강원 인제군 광치령 일대에서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벌이고 있다. 도솔산 전투가 벌어졌던 바로 그곳이다. 발굴작업은 국방부 통제에 따라 육군 제2사단이 맡고 있다. 60년 전 선배 장병들이 했던 약속을 후배들이 지키고 있는 셈이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올해 발굴에서 모두 28구의 유해와 600여점의 유품을 발굴했다. 이 중에는 사진과 편지가 있지만 자세한 내용을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돼 당국에서 정밀분석하고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단은 지난 2004년부터 강원도 인제.양구 일대에서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벌여 왔다. 2009년에는 해병대 장병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굴되는 등 2009년에만 모두 142위의 유해가 발굴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지난해에는 연인원 2만5000명이 투입돼 109위의 유해와 군번줄 등 8761점의 유품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렸다 .
전사자 발굴작업이 시작된 2000년 이후 찾아낸 유해는 모두 8417구. 이 중 7100여구는 국군, 13구는 유엔군, 1008구는 북한 및 중공군 유해로 판명됐다.
국방부는 아직 10만여구의 전사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산하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해발굴단 관계자는 "아직 10%도 발굴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군번줄' 없어 신원확인 어려워
전사자 유골을 찾긴 하지만 곧바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지난 2004년 경기도 가평군 북면 화악리에서 사진과 함께 발견된 나영옥 상병(전사 당시 18세) 등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품이 함께 있는 경우는 10%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방부 유해발굴단 관계자는 "발굴되는 전사자 유해 가운데 인식표(군번줄)가 있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전쟁이 발생한 지 한참이 지난 뒤(51년 중반)에야 인식표가 지급됐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갑자기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 때문에 발굴된 전사자 유해는 현장에 설치된 임시안치소에 모셔졌다가 한 해 발굴작업을 마무리할 때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발굴단 본부로 옮겨져 신원확인 절차에 들어간다. 신원확인은 유골에서 유전자(DNA)를 추출해 유가족의 DNA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전사자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다면 그것을 기초로 유골의 상태와 비교해 신원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DNA 대조를 통해 신원을 확인한다.
유해발굴단 관계자는 "신원확인을 위한 다른 기초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DNA 대조는 거의 유일한 단서가 된다"며 유가족들에게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하기도 했다. 국방부 유해발굴단 박신한 대령은 "전사자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의무"라며 "마지막 한 분까지 발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ohngbear@fnnews.com
■국방부 유해발굴단은 지난 2007년 창설된 전사자 유해 발굴 및 신원확인을 전담하는 부대로 대령급 지휘관 아래 200여명의 요원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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