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총수들이 불법·위법 행위나 비리의혹으로 사정당국의 수사를 받을 때 빠지지 않고 항상 등장하는 것이 횡령과 배임죄다.
굴지의 대기업 재벌 총수와 경영진이 구속되거나 법정에 서는 주된 죄목이 횡령 또는 배임이다.
국내 10대 그룹의 총수 중 7명이 횡령.배임 혐의로 조사를 받았거나 법정에 섰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이처럼 횡령과 배임은 기업인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범죄'다.
이 가운데서도 배임죄는 구성요건이나 판단기준이 모호해 재판부가 해석하기 나름인 이른바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운영돼 법조계나 산업계에서는 기업의 자율경영 및 창의경영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손톱 밑 가시 규제로 꼽는다.
범죄구성요건이나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 보니 재판 과정에서 무죄 선고율이 다른 사건에 비해 최대 9배나 높게 나타나는 등으로 인해 배임죄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거나 아예 없애야 한다는 주장마저 제기되고 있다.
■살인죄 수준의 비현실적 양형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배임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른 사람(혹은 법인·단체)의 업무를 맡은 자'가 '그 임무와 배치되는 행위'를 해서 '임무를 맡긴 사람이나 기업에 손해를 끼치고 다른 사람에게 재산상 이익을 준 행위'다. 형법 제355조(횡령.배임)와 제356조(업무상 횡령.배임)에 규정돼 있고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가법) 제3조에 따라 이득액이 △5억원을 넘으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 △50억원을 넘으면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등 가중처벌하도록 돼 있다. 살인죄의 최저형량이 징역 5년인 것을 감안하면 처벌 수준이 상당히 높다.
배임죄를 기업인의 시각에 맞춰 설명한다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자신이나 다른 기업 등에 이익을 넘겨줘 소속회사에 피해를 준 경우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대주주(혹은 대기업 오너)들이 지주회사나 주력계열사의 자금을 부실한 다른 계열사에 저리로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한 것 때문에 배임죄의 멍에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대해 재계에서는 "모기업과 자회사, 혹은 계열사를 모두 하나로 보는 국내의 기업 정서와는 배치된다"고 지적한다. 계열사 전체로 보면 분명 이익이 발생했는데 한두 개 계열사의 손해를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법적용이라는 지적이다.
재경 검찰청의 한 검사는 "같은 부모를 둔 형제들도 이해관계가 다르다"면서 "부모가 잘사는 큰아들의 돈을 무단으로 빼내 못 사는 막내에게 준다면 큰며느리가 가만 있겠느냐"라며 배임죄 처벌의 불가피론을 제기했다. 기업집단 전체로 보면 이익이 되지만 개별기업이나 다른 주주들 혹은 채권자 등 이해당사자 입장에서는 손해일 수 있기 때문에 그룹 총수의 행위를 제재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더구나 계열사 관계라도 각각 별도의 법인인 만큼 대주주가 함부로 회사 재산을 빼내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모험.혁신 등 경영 창의성 저해
사정 당국이 배임죄 처벌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재계는 득보다 실이 많다고 주장한다. 줄기차게 "배임죄가 기업가의 창의성을 가로막는다"며 폐지 혹은 축소를 요구해 왔다. 위험이 클수록 이윤도 커지는 것이 경영이고 경영상 위험요소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게 마련인 창의적인 경영행위까지 범죄로 몰아붙이는 것은 물론 한번 실패한 기업가들의 '재기의 기회'까지 가로막고 있다는 주장이다.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 당시 경제부처 장관들이 '정책상 판단오류로 외환위기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무더기로 기소됐다가 무죄를 선고받은 적이 있다"며 "따지고 보면 이들도 결과적으로 배임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 20일 '상법상 특별배임죄 규정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이라는 논문을 통해 "기업활동에 대한 과도한 형사적 개입은 자율성과 창의성이 존중돼야 할 경영활동을 위축시켜 국민경제에도 불이익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 등에서는 여전히 "과거 몇몇 재벌기업들이 일부 계열사의 부실을 막으려다 그룹 전체가 붕괴돼 국민경제에 부담을 준 사례"를 들어 배임죄가 존치돼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무죄선고율 다른 죄에 비해 최대 7배
대법원이 매년 발간하는 사법연감(2008~2012년)에 따르면 전체 형사사건의 무죄선고율은 1.48~2.45%다. 2010년과 2011년에 무죄선고율이 각각 8.8%, 19.44%에 달한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도로법 등 양벌제 위헌선고에 따른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례를 제외하면 2.45%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배임죄는 무죄선고율이 연간 평균 4%대에서 최대 19%대에 달한다. 이는 다른 범죄 평균 무죄율의 2~7배에 달한다. 실제 횡령.배임죄의 무죄선고율은 2007년과 2008년 각각 평균 6%와 7%를 기록했고 2009년부터는 4.5% 안팎이다. 특히 피해액 5억원 이상에 적용되는 특경가법상 횡령.배임죄(특정재산범죄)의 무죄선고율은 최대 19.4%(2008년)로 높다. 특경가법상 횡령.배임죄 무죄율은 2011년에 9.38%로 10%대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2010년 12.67%, 2009년 10.44%를 기록하는 등 10%대를 웃돌았다. 이는 검찰의 기소가 무리했다는 방증임과 동시에 배임죄의 기준이나 범위가 그만큼 모호하다는 재계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법조계 "기준 모호" 지적
심지어 현직 변호사들도 "배임죄는 경제 관련 범죄 중 가장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적용 범위가 넓고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이유에서다.
법무법인 화우의 김승훈 변호사(41.사법연수원 29기)는 "횡령이 금전 등 구체적인 재산을 빼돌려 이익을 취한 것인데 비해 배임은 구체적이지 않은 '재산상 이익'이 문제되고 손해발생의 위험성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며 "기준 등 모호한 부분이 많고 법관의 재량 범위도 넓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기업과 관련해서는 '경영상 판단'이라는 기준과 관련해 논란이 많다. 대법원은 "기업경영에는 원천적으로 위험이 내재하며 선의로 취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업에 이익이 된다는 믿음에 따라 신중히 결정했다면 예측이 빗나가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경영자에게 업무상 배임죄를 물을 수 없다"라고 판시한 바 있다. 합리적인 경영상 판단은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합리적으로 내린 경영상 판단'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일관된 기준이 없다.
'배임죄는 이현령비현령 제도'라는 불만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엉뚱하지만 창의적 발상이 혁신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전히 배임죄가 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도 피하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배임죄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비롯, 독일·프랑스·벨기에·일본·미국 정도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법조계 일각에서는 "민사상 손해배상으로 해결할 문제를 형사법까지 끌고 왔다"며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이와 관련, 정치권 일각에서는 "배임죄의 전면 폐지가 어렵다면 적용 범위를 줄이고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적어도 이현령비현령식 적용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배임죄 제도에 대한 대폭적인 수술이 임박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특별취재팀 양형욱 팀장 장용진 조용철 황상욱 이병철 예병정 성초롱 박소현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