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년 5월 29일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사방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군대를 보며 천년 제국의 마지막 날임을 직감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황제를 상징하는 모든 장신구와 치장물을 버리고 동로마 제국의 평범한 병사의 모습을 한 채 오스만 군대 한가운데로 돌진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지중해를 끼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천년 넘게 존속했던 제국은 59일간의 짧지만 치열했던 전투를 마지막으로 세계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동로마는 십자군 침략전쟁 때 베네치아 상인의 농간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빼앗겼다가 60여년 만에 되찾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주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저력을 보였던 나라였다. 동로마는 수백년간 유럽의 공격을 받으면서 서서히 약화됐다. 조금씩 서방 영토를 빼앗기고 십자군에게 수도를 잃기도 했고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수도와 몇몇 작은 섬을 제외한 동방 영토를 잃은 채 100년 넘게 버텼다.
이 무렵 약관 21살의 메흐메드 2세가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다. 메흐메드는 즉위 하자마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겠다고 백성들에게 천명했다. 제국의 한가운데 교통로인 포스포러스 해협을 장악하고 있는 동로마를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무렵 헝가리 사람으로 대포를 잘 만드는 우르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잇속에만 밝은 사람이었던 그는 먼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찾아가 많은 돈을 요구하며 이 기술을 살 것을 제안했다.
벽의 탄탄함과 유일한 약점이었던 성 북쪽의 골든 혼을 방어하는 갈라타 방벽을 튼튼하게 세웠다는 점도 우르반의 기술을 사는 일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비록 국력을 약화되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철옹성이었다. 하지만 메흐메드 2세는 달랐다. 그는 선조들과 아버지인 무라드 2세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왕국을 물려받았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선조들이 물려준 자신의 스펙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위대한 선조들 가운데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 포스포러스 해협을 지배하고자 했다. 포스포러스 해협을 장악함으로써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해상로와 동서 무역을 완전히 장악해 제국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온 우르반의 교활함을 간파했지만 그가 요구하는 엄청난 급료를 지불하고 기술을 샀다. 외국인인 우르반을 대포제조 책임자로 임명하고 개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제공했다. 끊임없는 관심으로 실험을 독려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파괴할 대포를 갖춰 나갔다.
메흐메드 2세는 탁월한 외교력으로 유럽 국가의 군대를 자기편으로 불러들였다. 게다가 배는 결코 산을 넘지 못한다는 사람들의 상식을 깨트리는 놀라운 작전을 폈다. 밤 사이에 갈라타 언덕을 통해 함대를 골든 혼으로 넘기는 작전을 성공시켰다. 갈라타 방벽과 쇠사슬로 완벽하게 방어하고 있다고 믿었던 동로마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산을 넘어 도시 북쪽 바다에 나타난 적의 해군을 보고 넋이 빠져 버렸다. 천년 동안 철옹성 같았던 삼중 방벽, 수십차례 골든 혼을 방어했던 갈라타 방벽, 적이 근접할 수 없는 자연 방벽과 해자, 풍부한 격퇴 경험. 이런 익숙한 것조차 혁신적인 메흐메드 2세를 만나자 힘없이 무너졌다.
혁신은 기존 구조를 바꾸는 일이고 익숙한 것을 깨트리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동로마의 멸망은 우리에게 혁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큰 사건이다.
김범규 중소기업진흥공단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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