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중견그룹의 부도사태가 잇따라 터지면서 대주주의 전횡을 막고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 등을 견제하기 위한 소액주주 권한 강화장치에 대한 관심이 재점화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집중투표제다.
집중투표제는 2명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소액주주들의 의결권을 집중하는 '누적투표제'를 말한다. 보유주식 1주당 선임하고자 하는 이사 수만큼의 의결권을 부여받고, 이를 여러 후보에 분산하거나 특정 후보에 집중해 행사할 수 있다.
이 제도가 의무화되면 소액주주들이 자신을 대표하는 사람을 이사로 선임하거나, 대주주가 내세운 후보 중 문제가 있는 사람이 이사로 선임되는 것을 제지할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정부는 현재 유명무실한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그 처리는 불투명하다. 실제 지난 8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상법개정안은 재계의 거센 반발로 잠정 유보됐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에만 반강제적으로 도입돼 있는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될 경우 자칫 외국자본의 '먹튀 놀이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집중투표제 도입 '미미'
9일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현재 국내 매출액 기준 상위 30곳 중 정관변경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기업은 한국전력공사, 포스코, 한국가스공사, KT, 대우조선해양, SK텔레콤, 한화생명 등 7개 기업이다. 10대그룹 상장 계열사 92곳 중에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곳은 SK텔레콤과 한화생명보험 단 2곳뿐이다.
특히 주식시장에 상장한 기업집단별로 보면 총 51곳의 기업집단 중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곳은 11곳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태영그룹이 전체 4곳의 상장사 중 2곳에 도입하고 있으며 한화, 한전, 코오롱, KT&G, SK, CJ 등 나머지는 전체 그룹 상장사 중 한 곳만이 집중투표제를 실시하고 있다.
집중투표제는 지난 1998년 상법 개정을 거쳐 다음해 6월부터 실시됐다. 기업이 주총의 특별결의로 배제하지 않는 한 이사의 선출을 집중투표방식으로 하도록 한 것이 그 요지. 올해로 시행 14년이 지났지만 대부분 기업들이 정관으로 이를 변경해 제도를 적용받는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올해 새 정부가 들어서며 경제민주화라는 기치 아래 지난 7월 법무부가 집중투표제를 단계적으로 의무화하는 내용의 상법개정안을 입법예고하는 등 도입을 앞당기고 있다. 하지만 재계의 반발이 거세다. 소액주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도가 의무화된다면 외국계 자본이나 비우호적인 세력의 경영권 간섭에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찬반 논란 '팽팽'
이로 인해 집중투표제 도입을 놓고 정부와 재계, 학계 간 의견차가 나타나고 있다.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제도 도입이 오히려 기업의 자율성을 해치고 외국자본의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는 반면 대주주가 긴장하고 경영할 수 있도록 단계적 도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방문옥 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 연구원은 "정관에서 배제할 수 있도록 자율사항을 둬 매년 집중투표제 도입률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면서 "소유가 분산된 미국과 달리 대주주가 존재하는 국내 기업환경에서는 대주주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집중투표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소액주주들의 권익보호장치로 추진된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다면 외국계 투기세력이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현재 이 제도를 강제하고 있는 국가는 칠레와 러시아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해 오히려 경영효율성을 저하시키고 경영 부담을 증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전삼현 숭실대 법대 교수는 "이미 주총 정관변경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배제한 기업은 주주들의 선택과 자율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통해 결정된 것이다. 의무화만 안됐을 뿐이지 집중투표제를 이미 반강제적으로 규제하고 있는 것은 회사법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이어 "최대주주가 전횡을 저지르면 이를 견제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현재 국내 대기업은 외국인들의 지분이 많은 편"이라며 "외국인들은 보통 기관투자가에 의뢰해 위임권을 행사하는데,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되면 외국자본이 경영권을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꼬집었다.
kiduk@fnnews.com 김기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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