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부족으로 온 나라가 신음하면서도 외환보유액까지 헐어 은행에 쏟아붓던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당시. 은행은 무너지지 않아야 하는 경제의 근간이었다. 특히 금융결제시스템 안정성은 어떤 희생을 치러도 지켜야 할 과제였다.
위기의 기억은 끈질겨서 은행에 대한 우리 사회의 믿음과 지원은 여전하다. 대표 사례가 '주채무계열' 제도다. 외환위기 이후 민간 자율의 기업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됐지만 기업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대출을 해준 은행들이 기업 부실로 자산건전성이 악화돼 금융불안이 야기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기업이 아닌 은행을 위한 제도로 출발했고 은행업감독규정에 따라 현재도 시행 중이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몇 개 시중은행이 무너지고 이후 통합되는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은행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대우그룹의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은행 관리를 거치면서 회생에 성공한 기업도 대우인터내셔널, SK하이닉스 등 여럿 있다.
'동양 사태'로 은행의 역할 강화론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동양그룹처럼 부실이 심화됐지만 은행의 견제를 받지 않는 대기업이 생겨나자 금융당국이 은행을 통한 '감시망'을 확대키로 한 것이다. 은행의 밀착감시와 관리를 받을 주채무계열 편입대상 대기업을 전체 금융회사 신용공여액 0.1% 이상에서 0.075% 이상으로 늘리고 '관리대상계열' 제도도 도입하겠다는 내용이다.
동양 사태에 연루된 투자자가 5만여명, 투자금액이 1조6000억원에 달하고 "기업 구조조정에 구멍이 뚫렸다"는 여론이 비등한 상황에서 금융당국의 주채무계열 제도 개선은 타당하다.
문제는 약발이 약해지고 있는 은행 중심 시스템의 한계를 안고 있는 방안이라는 점이다. 금융당국이 은행을 제어하고 은행이 기업을 관리하는 주채무계열 제도는 동양 사태가 터지기 전만 해도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기업 구조조정은 시장의 원칙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지 정부가 미리 나설 일이 아니다"라는 게 금융당국의 언급이었다. 이는 주채무계열 대기업 숫자가 2009년 45개, 2011년 37개, 2013년 30개로 계속 줄어드는 추세에서도 드러난다.
금융당국의 복안은 자본시장 중심으로 기업구조조정 등 정책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은행 대출이 유일한 기업의 자금줄 역할을 하던 시대가 지났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지난 9월 말 현재 회사채 발행잔액은 229조5000억원, 기업어음(CP) 발행규모는 141조원가량으로 합치면 약 370조원이 된다. 은행권 대기업 대출잔액 154조8000억원의 2배가 넘는다. 이 같은 수치는 주채권은행 중심의 대기업정책은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갑을 관계에 빗대 주채무계열 제도의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중 유동성이 넘쳐나고 저금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은행이 '을', 대기업이 '갑'이라는 것이다. '을'이 '갑'의 재무상황을 수시로 체크하고 구조조정에 나서라는 것이어서 금융현장과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다.
물론 '제2의 동양 사태'를 막기 위한 주채무계열 제도 보완은 필요하다. 다만 은행 중심 시스템 강화가 자본시장 역량 약화로 연결돼서는 안 된다. 국내 증권사 62곳의 자기자본을 합쳐도 KB금융, 우리금융지주를 합한 것보다 7조원 이상이나 적은 현재의 낙후된 자본시장 구조를 해소해 나가는 길이 금융시스템을 더욱 안정시키는 길이다.
비난 여론을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적 정책보다는 금융대계가 있어야 한다. 시중 금융제도의 핵심인 독자신용등급 제도 도입 등 신용평가 선진화방안 시행, 외부감사제도 개선,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 등이 시급하다.
mirror@fnnews.com 김규성 증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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