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서울 이태원 집에서 막 일어나 황급히 낮 12시 대학로 인터뷰 장소로 달려왔다.
밤새 무얼 했느냐고 묻자 영화 시나리오 작업으로 아침 7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다. "원래 밤낮없이 삽니다. 밤낮이 있으면 제가 직장을 다녀야죠. 하하."
공연을 앞둔 국립극단의 신작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의 작가 김지훈(34·사진). 시인으로 등단한 뒤 연희단거리패 배우로도 3년여 생활했고, 그 기간 잠자는 시간을 쪼개 써낸 희곡 '원전유서'(2008년)가 연극계를 강타하면서 작가로 돌아선 지 5년째. '방바닥 긁는 남자' '길바닥에 나앉다' 등으로 평단과 관객의 뜨거운 지지를 받아오다 지난해 2월 4시간짜리 '풍찬노숙'에서 탁 멈췄다. "너무 길었죠, 좀 덜어냈어야 했는데…."
사실 한 번 쓰면 방대한 서사를 풀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건 이 작가의 특기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도 처음엔 4시간짜리 분량이었다. 무대를 맡은 미니멀의 대가 김광보 연출의 간청과 협박으로 그는 절반을 잘라냈다. "전 10m짜리 그림을 그렸는데, 1m짜리 액자밖에 없는 여건이니, 욕심을 부리면 억지였죠. 그런데 더 매끈해졌어요."
작품은 시대를 알 수 없는 상상의 시·공간에서 무한정 전쟁을 펼치고 있는 남자들의 위선, 허상, 암투를 그리면서 그들의 진로를 가로 막고선 여인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남자들의 시각에선 이 여인들은 '전쟁터를 훔친 도둑년들'이지만 역사는 이 순진하면서도 강인한 여성들의 의지·모성으로 지탱된다는 작가의식이 깔려있다.
"한동안 조선왕조실록에 빠져 있었어요. 좋은 왕도 많았지만 세상은 항상 똑같다, 그 생각을 했습니다. 컵은 바뀌어도 물은 바뀌지 않는 것처럼요. 인간사가 고대, 중세, 현대로 오면서 정말 바뀐 게 있을까요. 그 사실이 저를 눌렀습니다. 곪아서 터지고, 엎어지는 이상한 시대가 무한반복되는데, 전 여기서 주인공을 길바닥 상인들, 자식 키우는 엄마들로 눈을 돌렸습니다. 세상을 아우르는 모성을 저 꼭대기에다 올려놓고 싶은 심정으로요."
무대는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를 지닌 오브제 '개짐(생리대)'을 통해 여성들의 억압 기제에도 저항한다. 여성주의 작가상이라도 받는 거 아니냐고 하자 "그건 원하던 바가 아니다. 곧바로 도망칠 것"이라며 얼굴을 붉히고 웃었다.
작품은 '원전유서' '풍찬노숙'에 이어 다시 신화적 상상의 세계가 무대다. 그는 "창조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상상력이다. 상상의 세계를 통해 현실의 돌파구를 보여주고 싶었다. 연극이 체호프류만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호랑이도, 곰도 나올 수 있다. 극장에서 그 상상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도 했다.
이제껏 순수연극만 고집하며 옆길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이젠 장르를 불문하고 왕성한 창작열을 보이고 있는 건 그에게 또다른 도전이다. 그는 핵무기를 다룬 블록버스터 영화 시나리오 작업 마무리단계에 있다. 내년엔 가벼운 연극 여러 편에도 손을 댄다. 공연은 26일부터 12월 8일까지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 이호재, 오영수, 길해연 등 쟁쟁한 배우들이 나온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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