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과 트위터·페이스북·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소통하는 첨단 디지털시대에 대자보(大字報)열풍이라니 대단한 역설이다. 대학가에서 대자보가 일상화된 때가 1970, 80년대다. 신문·방송 같은 기존 미디어와 출판물이 엄격히 통제받는 상황에서 대자보는 개인이 다수에게 주장을 전달하고 소통을 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이었다. 전지에 매직을 꾹꾹 눌러쓴 글자 하나하나에 비장한 시국 인식과 절절한 호소를 담은 대자보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그리고 구시대적인 소통방식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연히 사라졌다.
고려대 주현우씨(27)가 지난 10일 교내에 붙였다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SNS를 타고 급속히 유포되면서 우리 사회는 대자보 신드롬에 휩싸였다. 전국 각지 대학에 비슷한 형식의 수많은 대자보가 매일같이 나붙더니 교수, 정치인, 중·고등학생에 직장인까지 공감대가 확산됐다. 이는 SNS 같은 디지털 소통수단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정성과 당당함, 순수성을 대자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씨의 대자보는 하고 싶은 얘기를 차근차근 자필로 써내려가고 마지막에는 학번·학과·이름까지 제시했다. 투박하고 순진하지만 나름의 현실 인식을 드러내고 '행동하자'가 아닌 '함께 생각해보자'는 권유형의 담론을 끌어냈다. 생각의 속도보다 자판 두드리는 속도가 더 빠른 것이 요즘 SNS세대다. 즉각적이고 말초적인, 그리고 단문 형태의 소통과 남의 의견 퍼나르기에 익숙한 데다 익명의 방패 뒤에 숨어 일방적인 주장을 앞세워온 세대에게 이런 대자보가 솔깃했을 것이다.
청년들이 대자보 신드롬을 계기로 사회 현상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진심 어린 의견개진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사실에 입각한 현실 인식과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좌·우의 진영논리, 정치논리가 개입돼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면 대자보도 그저 한때의 유행에 그칠 것이다.
현재 확대재생산되는 대자보를 보면 진영논리가 개입돼 변질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칠 수가 없다.
대다수 대자보는 순수성을 지키고 있는 듯하나 일부 대자보는 너무나 태연하게 '민영화 괴담'을 늘어놓고 정치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어느 초등학생이 썼다는 대자보에 "부패한 정부는 모든 것을 민영화한다"는 노엄 촘스키의 말이 소개됐다. 특정 정치세력, 이익집단이 대자보 신드롬을 악용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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