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단위변경(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을 두고 한국 경제가 술렁이고 있다. 지난 2002년 국내 금융회사의 파생상품 거래규모가 1경1508조원을 기록해 처음으로 경 단위 통계가 쓰인데 이어 최근 한국의 국부 규모 역시 1경630조6000억원을 기록했다. 이미 경(京) 단위의 화폐 통계는 우리나라 실물경제의 지표로 자주 등장하고 있고 금융·증권·산업 등 관련 업계를 중심으로 화폐단위변경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시행하게 되면 과도하게 커진 가격 단위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고 원화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선뜻 화폐개혁을 단행하기는 어렵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신·구화폐 교체와 각종 전산시스템을 수정해야 하고 무엇보다 국민적 불안감까지 합쳐지면 한국경제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화폐 개혁' 두고 기로에 놓인 당국
이미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3차례에 걸쳐 화폐의 교환비율과 호칭을 조정하는 통화조치를 실시한 바 있다. 지난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피침지역에서 불법 남발된 적성통화의 유통을 막고 경제교란행위를 봉쇄하기 위해 제1차통화조치가 단행됐다.
이후 1953년, 전쟁이 발발한 후 막대한 전비지출 등에 따른 통화증발로 1950년대 초부터 물가상승(인플레이션·Inflation)이 급속도로 진행되자 이를 막기 위해 정부는 통화 단위를 100분의 1로 절하하고, 화폐호칭도 '원(圓)'에서 '환'으로 변경했다. 마지막 통화조치는 1962년 군사정변 이후 재정 및 금융면의 확장정책을 근거로 통화단위를 10분의 1로 절하하는 동시에 화폐호칭도 '환'에서 '원'으로 교체됐다.
50여년이 지난 현재, 리디노미네이션을 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다시금 강해지고 있다. 자본시장은 물론 정부 통계까지 영(0)이 16개나 등장하는 1경을 넘어서는 일이 흔해지면서 화폐단위변경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권과 경제계 등은 끊임없이 화폐개혁에 대한 제안을 정부 당국에 해온 상태이며 관련부처 역시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기 위해선 리디노미네이션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몇 차례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움직임이 수차례 제기된 상황에도 아직까지 당국이 고민하는 속사정은 따로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에 따른 부작용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정가가 정해져 있지 않은 부동산시장의 경우 가장 큰 여파를 겪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만약 1000분의 1로 화폐단위를 변경하게 되면 서울지역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4억~5억원대에서 50만원 전후로 떨어지게 된다. 문제는 화폐가치가 반영되면, 5억원짜리 아파트가 6억원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50만원대에서 60만원으로 상승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
부동산업계 한 관계자는 "리디노미네이션이 이슈화될 때마다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장이 바로 아파트 등 부동산"이라며 "최근 들어 화폐단위가 변경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동산 투자에 더욱 열의를 보이는 강남 큰손들이 정말 많다"고 전했다.
실물투기우려 외에도 자금의 해외도피나 물가폭등, 경제불안심리 등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게 관련 업계 및 당국의 공통된 전언이다. 또한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등 각종 장비와 현행 '원' 단위가 표시되는 장부 전산시스템과 연관된 각종 프로그램 교체에 따른 비용도 수조원대로 상당하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최우선
그럼에도 정부가 액면단위를 낮추려는 행보에는 최근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경제 불황과 비대해져가는 지하경제 때문이다.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각계 입장은 사실상 공론화된 상황이고, 시행시기를 맞추는 게 당국의 최대 현안 중 하나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화폐개혁의지에 대해 공감하는 입장인 반면 단계적 시행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2000년대 이후 여러 나라에서 단행됐던 리디노미네이션의 사례를 보면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주된 목적은 달성되지 못한 채 되레 물가상승과 경제혼란만 가중시킨 경우가 적잖다.한국은행 관계자도 "지하자금이 만발하는 이때 건강하지 못한 금융시장의 선작용을 위해서라도 화폐단위변경은 필요한 상황"이라면서도 "국민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된 후, 한 단계 한 단계 점진적으로 밟아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최근 공식석상을 통해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필요성은 공감하나, 워낙 민감한 사안이고 물가 상승 우려도 있는 만큼 섣불리 이행되긴 어렵다"고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gms@fnnews.com 고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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