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논단] 인문의 힘과 세월호 참사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6.05 17:47

수정 2014.06.05 17:47

[fn논단] 인문의 힘과 세월호 참사

필자는 24년간 유럽에서 근무했던 국제통상전문가이지만 두 권의 인문서적도 출간했다. 인문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 긴 세월을 해외에서 보낼 수 있었을까. 인문서적을 읽으며 타향살이의 설움도 잊을 수 있었고 지성의 폭을 넓혀 세계의 전문가들과 나란히 경쟁할 수 있었다.

우리 세대는 또한 가난하고 고달픈 청춘을 인문으로 견뎌냈다. 책을 읽지 않고는 청춘의 의무를 다할 수 없다고 믿었기에 밤 새워 책도 읽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박인환의 시는 주머니 속에 있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귀국하고 보니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입시를 위해 책의 줄거리만 암기한다고 한다. 책을 읽지 않고도 대학을 갈 수 있다니 이런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외국에서는 지금도 중 고교 시절에 고전 문학과 철학 책을 많이 읽는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고대어로 읽는 것도 기본이다. 책을 읽지 않고 대학을 갈 수 있고 대학을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필자의 경험으로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책을 읽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책을 읽지 않는 민족은 책 읽는 민족을 이길 수 없다.

흑인 여성으로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의 얘기다. 라이스가 대학원에 입학했더니 국제정치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초프 형제들'을 읽어 보았느냐고 물었다. 아직 읽지 않았다고 했더니 그 책부터 읽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학생들에게 지적 호기심을 키워 주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지적 호기심이 있어야 공부를 해낼 수 있기 있기 때문이다. '카라마초프 형제들'은 인류가 물려받은 위대한 문화 유산이다.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부터 신과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거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날 밤 잠자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종종 생각하게 된다. 정치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 큰 정부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장관급 기구가 두 개나 더 생기고 부총리도 한 명 더 생길 모양이다. 안전담당 공무원을 더 많이 채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참사를 겪고도 공무원을 더 채용해야 한다는 발상이 놀랍기만 하다.

과연 우리 사회가 결여된 것이 공무원의 숫자일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맡은 일과 주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창의적으로 문제 해결에 몰두하는 정신의 결여, 지적 호기심의 결여, 바로 이것이 문제가 아닐까. 성적표에 의존하지 않고 좋은 학생을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한 대학, 훌륭한 인재를 찾으려는 노력 대신에 스펙에 의존해 버리고 마는 인사담당자들,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문제도 지적 호기심의 결여인 것 같다.

어떻게 지적 호기심을 키울 수 있느냐고? 바로 인문 고전읽기다. 인문의 세계는 아름답고 웅대하고 황홀하다. 고전을 읽으면 생각하는 눈을 가지게 된다. 매사에 호기심이 생기고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어제 택배로 우편물이 왔다. 지방에 있는 독자가 필자의 책에 사인을 해달라고 보낸 것이다.
사인을 하며 손이 떨린다. 그래 인문의 힘으로 살자. 인문의 힘으로 세월호의 참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자.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세월은 가고 오는 것/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해야 한다….

김의기 법무법인 율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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