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석의 통일이야기] (3) 동독 주민들의 대탈출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7.06 17:21

수정 2014.07.06 17:21

[양창석의 통일이야기] (3) 동독 주민들의 대탈출

우리와 같은 분단국이던 독일은 어떻게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는가? 이는 동독 정권의 붕괴, 동서 냉전구조의 해체, 서독의 경제적.외교적 능력 등 삼박자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가장 잘살던 동독이 왜 무너졌을까. 동독 정권의 붕괴는 주민의 대탈출과 대규모 시위(월요 데모)에 의해 촉발됐다. 이런 혁명적 사태에 잘 대응하지 못했던 동독 지도부의 무능과 실수도 정권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동독 주민의 대규모 탈출 드라마는 헝가리에 의해 연출됐다. 1989년 5월 2일 헝가리 정부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설치된 철조망 중 일부분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을 들은 동독 여행자들이 오스트리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해 6월 헝가리는 유엔 난민협약에 서명하고 6월 27일 호른 헝가리 외무장관과 모크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이 국경선의 철조망을 제거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 극적인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본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을 결심하게 됐다.
동독 출신으로 통일 후 독일 하원의장을 지냈던 볼프강 티르제는 "동독 주민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바늘구멍 같은 기회가 왔다. 지금 가지 않으면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때처럼 길이 막힐지 모르니 지금 우리도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라고 말했다. 7월부터 동베를린 주재 서독 상주대표부와 부다페스트, 프라하, 바르샤바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수백명의 동독 탈출 주민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9월 11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완전히 개방한다고 발표했다. 1989년 말까지 34만3854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했으며 1990년 1월 들어서는 매일 2000명씩 서독으로 탈출했다.

사실 헝가리의 이런 조치는 동맹국인 동독을 배신하고 서독을 지원하는 어려운 결단이었다. 탈북자를 북한으로 송환하는 중국·북한 사이의 협정과 같이 헝가리는 여행허가증이 없는 동독 주민을 서방 국가로 출국시켜서는 안 된다는 '여행협정'을 동독과 체결한 바 있었다. 동독 정부는 헝가리에 탈출민의 송환을 요구했으며 헝가리의 국경 개방을 '동독 시민을 은화 몇 푼과 바꾼 거래'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왜 헝가리는 동독을 버렸을까. 첫째, 개혁을 추진하던 헝가리로서는 서방세계, 특히 서독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필요로 했다. 헝가리 총리는 8월 말 본에서 서독 콜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동독 탈출민을 동독으로 되돌려보내지 않고 서독으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 보답으로 콜 총리는 10억마르크의 경제지원을 제공했다. 둘째, 고르바초프가 소련이 위성국가들의 내정에 개입하는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기 때문이다. 1989년 3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헝가리의 네메스 총리는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에 대해 고르바초프의 동의를 얻어냈다. 셋째, 헝가리로서도 루마니아 등 이웃 국가로부터 이주해 오는 헝가리 동포를 수용해야 했는데 이에 필요한 유엔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탈출 사태로 동독 정권은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됐다. 전문인력 유출로 일상생활의 단절이 초래됐고 이것은 다시 다른 주민의 탈출을 부추기는 악순환이 일어났다. 탈출민의 3분의 2는 20~40대의 젊고 유능한 인력이었다.
의사, 약사, 버스 기사, 기능공 등의 탈출로 병원과 상점이 문을 닫고 버스 운행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규모 탈출은 동독 정권에 대한 거부감과 불만, 배신감을 발로 표현한 '발로 이룬 혁명'이었다.
국민이 정권에 대해 충성심과 기대를 내던져버리자 동독 정권은 붕괴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양창석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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