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한국해양대 실습선 한바다호를 타고 경북 포항 영일항을 출발한 2만3000㎞ 해양실크로드 탐험대는 항해 나흘 만인 20일 첫 번째 기항지인 중국 광저우항에 도착했다.
탐험대와 연구자들은 일정을 조율하면서 해항도시 광저우에 남아 있는 해양실크로드 유적 탐방으로 첫 기항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2000여년 전 진한시대부터 중국의 중요 무역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광저우는 동서양을 잇는 해상실크로드의 중요한 시발항 중의 하나가 됐다.
청나라 때는 대외에 개방된 유일한 해항도시가 돼 '황제의 남쪽 보물창고'로 불릴 만큼 경제적 번영을 구가한 해항도시다. 광저우는 개항 이후 한 번도 폐쇄된 적이 없는 유일한 중국의 항구도시이기도 하다.
광저우는 황제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오히려 외부 세계와는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3대 종교라는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처음 전래된 개방적 공간이 될 수 있었다.
대외에 개방된 해항도시 광저우에는 우리 민족과 관련된 유적도 남아 있다. 광저우가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광효사(廣孝寺)를 방문한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 소장은 "신라 승려 혜초가 천축으로 구도의 길을 떠나기 전 이곳에 주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회성사에는 고려인 최초의 이슬람 신도로 추정되는 라마단의 비석이 보관돼 있어 8세기 이후 한반도와 광저우의 관계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려줬다.
광저우는 8∼9세기 아시아인이 주도한 관계성에 기초한 쌍방교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아편전쟁과 같은 불행한 근대의 해양실크로드의 모습도 간직하고 있다. 광저우의 젖줄인 주장 강변에 위치한 사면(沙面)은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과 프랑스가 청나라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건설한 공공조계지였다. 바닷길을 막고 고립을 자초해 불행한 근대를 경험했던 중국은 지금 스스로 항구를 개방하고 서구 열강들이 건설한 유럽풍의 건축물을 카페나 음식점으로 개조해 광저우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공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서구 열강의 군함과 무역선이 넘나들던 주장에는 중국 남부경제의 중심으로 우뚝 선 광저우의 야경을 구경하기 위해 중국 각지에서 모여든 관광객을 가득 태운 유람선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지금 광저우에는 레바논, 시리아, 이란 등 중동 각지에서 이주해 온 무슬림이 거리를 메우고 석실성심성당에는 미사를 드리기 위해 모여든 아프리카인들로 가득했다. 조선족 동포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해항도시 광저우는 새로운 이주민에 대해 다시 포용의 태도를 보여주고 광저우 사람들 역시 새로운 해항도시를 찾아 이주를 떠나고 있다. 광저우 시내에서 무슬림이 먹고 쓸 수 있는 자그마한 할랄 가게를 운영하는 레바논 출신 사장은 국내 정치가 불안한 중동 사람들에게는 광저우가 평화와 기회의 땅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지난해부터 중국 정부가 주창한 21세기 새로운 해양실크로드 건설이라는 구호가 결코 공허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광저우 도착 이틀째인 22일 경상북도와 한국해양대가 주최하고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가 주관한 '해양실크로드와 해양도시' 국제학술대회가 중산대학에서 열렸다. 학술대회에는 김남일 경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 박한일 한국해양대총장, 허영생 중산대학 총장 등을 비롯한 학계·관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양궈전 샤먼대학 교수가 '해양실크로드와 해양문화연구'를 주제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 '해양실크로드의 개념 검토'를 주제로 각각 기조강연을 했다. 양궈전 교수는 "인류의 해양발전 과정을 보면 해양시대, 글로벌 해양시대, 입체적 해양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며 "오늘날 각국이 해양실크로드를 진흥하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선택으로, 해양 아시아와 대륙 아시아가 대립하는 해양연방론 경쟁을 만들어내는 현실적 의의를 갖는 것"이라고 피력했다.
해양실크로드 탐험대는 광저우항에 도착한 뒤 학술대회와 광둥성박물관 방문과 하이링다오 해상실크로드 박물관 신라 금관 기증식, 중산기념당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하고 23일 다음 행선지인 베트남 다낭항으로 향했다.
글:최낙민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硏 HK교수
<fn·부산fn·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硏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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