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흡연자님 고맙습니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12.03 16:49

수정 2014.12.03 16:49

[곽인찬 칼럼] "흡연자님 고맙습니다"

서울 여의도역에서 회사까지 이어지는 대로변은 금연구역이다. 흡연자들은 이면도로에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태운다. 간혹 금연구역에서 연기를 내뿜는 이들도 있다. 이럴 땐 은근히 눈을 흘기며 옆으로 피하거나 아예 앞질러 갔다.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겠다.
담배 소비자야말로 복지 선진화의 물꼬를 튼 애국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올 예산국회를 총평하면 승자는 정치권, 패자는 흡연자다. 비과세·감면 혜택이 준 대기업도 패자로 볼 수 있지만 적어도 법인세율 인상만은 막았다. 그에 비하면 흡연자는 완패다. 갑당 2500원짜리 담배가 졸지에 4500원이 됐다. 하루 한 갑을 피우면 월 지출액이 7만5000원에서 13만5000원으로 뛴다. 1년으로 따지면 164만원이다. 이거 정말 장난 아니다. 담뱃값의 74%가 세금이다. 납세자의 날에 감사패라도 전달해야 할 판이다.

정치인들은 큰 몫을 챙겼다. 야당은 대기업에 돌아갈 비과세·감면 혜택을 줄였다. 이 돈이면 모자라는 무상보육비를 얼추 충당할 수 있다. 여당은 담뱃세 인상을 관철했다. 정부는 담뱃값 인상 덕에 세금이 2조8000억원 더 걷힐 걸로 본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5조원을 예상한다. 중간값을 잡아도 4조원 가까운 돈이다. 우와, 이 돈이면 선심성 무상복지 정책을 신나게 펼칠 수 있다. 정치인들에겐 횡재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겉으론 티격태격했지만 속으론 마음이 통했던 모양이다.

담배에 물리는 세금은 죄악세다. 미국에서도 정부 곳간이 빌 때마다 죄악세가 단골로 등장한다. 첫 총대는 1794년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멨다. 당시 미국은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르느라 재정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의회의 반발로 담뱃세는 흐지부지된다. 담뱃세가 부활한 것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때다. 남북전쟁으로 텅 빈 나라 곳간을 채우기 위해서다. 이후 담뱃세는 연방정부의 주요 세목으로 자리잡는다. 20세기 들어선 아이오와주(1921년)를 필두로 주정부도 따로 담뱃세를 매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모든 주가 세금을 물린다. 이어 뉴욕시를 비롯한 시정부도 가세했다. 미국에서 팔리는 담배엔 연방·주·시정부가 각각 물린 세금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담배만큼 만만한 게 술이다. 역시 악역은 해밀턴 재무장관이 맡았다. 술 판매업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세무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역사는 이를 위스키반란(1791~1794년)으로 기록한다. 깜짝 놀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민병대를 동원해 반란을 제압했다.

박근혜정부도 죄악세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담배는 성공했고 다음 차례는 레저세다. 국회엔 카지노·스포츠토토·복권에 레저세(매출의 10%)를 물리는 법안이 제출돼 있다. 강원랜드 등 카지노 업계에선 난리가 났다. 지금처럼 복지가 늘면 주세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외국처럼 비만세가 나올지도 모른다.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나 사탕, 청량음료 등이 과세대상이다. 도박꾼, 술꾼, 뚱보들은 정신 바싹 차려야 한다.

담뱃세 인상은 명백한 증세다. 국민건강 증진은 핑계다. 국회는 막판 담뱃갑에서 경고 그림을 빼기로 했다. 담배 판매가 줄까봐 그랬다는 오해를 살 만하다. 선진국 예를 보면 흉측한 그림은 흡연율을 뚝 떨어뜨린다. 담뱃세로 걷은 세금은 주로 건강보험 재정을 지원하는 데 쓴다. 오롯이 흡연자한테 돌아갈 몫은 야속하리만큼 적다. 넉넉해진 재정은 다가올 선거에서 정치인들의 선심성 공약을 뒷받침하는 실탄이 된다.

이번 증세는 아주 나쁜 선례를 남겼다. 결국 무상복지 비용을 납세자, 그중에서도 서민이 메운 꼴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여야는 원내대표 등이 참석한 '3+3' 회동에서 담뱃값 인상, 예산안의 법정시한 내 처리 등에 합의했다. 그때 누군가 "가슴이 뭉클하다"고 말했다.
그는 "뭉클하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흡연자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어야 옳다. 나부터라도 달라져야겠다.
"흡연자님들, 고맙습니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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