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경북)=윤경현 기자】 #.지난 8월 1일 가족들과 동해안으로 피서를 떠난 김모씨(54·여·경북 경산)는 갑작스러운 가슴통증을 호소해 울진군의료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심근경색을 의심한 의료진은 즉시 안동병원에 '닥터헬기'를 요청했다. 안동병원 항공의료팀은 운항통제실에 기상상황을 확인한 후 환자를 인계받기 위해 울진으로 날아갔다. 울진중학교까지 걸린 시간은 23분이었다.
의료팀은 헬기 내에서 응급조치를 시행하며 병원에 심장혈관조영술 준비를 요청했다.
응급의료 전용헬기인 닥터헬기(Air Ambulance)는 '하늘을 나는 응급실'로 불린다.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탑승해 현장에 도착하는 즉시 치료를 시작한다. 항공이송 중에도 병원과 연락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의료진과 장비를 대기시켜 놓는 등 중증응급환자 치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도서 및 산간지역 중증응급환자는 장시간 이송되거나 적정한 이송수단이 없어 응급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닥터헬기가 생겨났다. 2011년 9월 섬이 많은 인천(가천대길병원), 전남(목포한국병원)에 처음 도입됐다. 지난해 7월 강원(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경북(안동병원)에 추가로 배치됐다.
닥터헬기는 국립중앙의료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위탁을 받아 헬기사업자인 대한항공과 계약을 맺고 운영한다. 기장과 부기장을 비롯해 의사, 응급구조사(또는 간호사), 환자, 보호자 등 최대 6명까지 탈 수 있는 소형 헬기다.
규모는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다. 인공호흡기, 응급초음파기기는 물론 심근경색 진단이 가능한 12유도 심전도와 효소측정기 등 여느 병원 부럽지 않은 고성능 응급의료기기와 응급의약품을 갖추고 있다. 환자를 이송하는 중에도 제세동(심장박동)과 심폐소생술, 기계호흡, 기관절개술, 정맥 확보와 약물 투여 등 전문적인 처치가 가능하다.
지난달 27일 경북지역 중증응급환자들의 신속한 초기대응을 돕고 있는 안동병원을 찾아 닥터헬기의 활약상을 들여다봤다. 안동을 포함한 경북 북부는 산악지대인 데다 농촌인 탓에 큰 병원도 없어 닥터헬기의 존재가 무겁게 느껴지는 곳이다.
■헬기로 줄인 5분이 환자를 살린다
오전 9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임에도 안개가 자욱해 50∼100m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안동병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자리잡은 응급항공의료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 응급구조팀의 창고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한 것이라는 게 병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날 근무조는 이성훈 응급의학과장(43)과 김효중 응급구조사(29)였다. 의료진 외에 대한항공 소속의 헬기 운항관리사와 조종사, 정비사 등이 한 팀이 된다. 이들의 달력에는 휴일이나 명절의 구분이 없다. 김 구조사는 "매일같이 생사가 왔다갔다 한다. 한가로이 휴일을 즐길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현황판에는 이달에 23번 출동해 18명의 환자를 이송했다고 적혀 있었다. 김 구조사는 "올해 전체로는 하루에 한번꼴인 345차례 출동했다"면서 "환자의 사망이나 기상악화 등으로 임무가 취소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311명의 환자를 이송했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근무시간은 헬기가 움직일 수 있는 일출부터 일몰까지다. 다만 하루 일을 준비하기 위해 적어도 해뜨기 30분 전에는 나와야 한다. 김 구조사는 이날 오전 6시30분에 출근했다. 곁에 있던 운항관리사가 "헬기가 이륙하기 위해서는 시정이 5000m가 돼야 하는데 오전에는 헬기가 뜨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알려줬다.
헬기 탑승에 대한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을 법도 하다. 실제로 헬기 타는 게 싫어서 병원을 그만둔 의사도 있단다. 그런데 '놀이공원의 놀이기구도 무서워서 못 탄다'는 김 구조사는 지난 3월 닥터헬기를 자원했다. 헬기를 타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나 지금은 버스나 택시를 타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이 돼버렸다.
닥터헬기가 탄생할 때부터 고락을 함께하고 있는 이 과장은 "군대에서 헬기를 타본 이후 헬기는 처음"이라며 "가족들이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어 "헬기와 응급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일주일에 하루 닥터헬기를 맡는데 지금까지 100여차례 탑승했다"며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헬기가 휘청거려 아찔할 때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구조사는 "119 헬기가 3000㏄급 '대형 승용차'라면 닥터헬기는 '경차'로 생각하면 된다"며 "내부공간이 좁아 심정지 환자의 경우 처치가 곤란할 정도"라고 토로했다. 더구나 보호자가 환자에게 필요한 짐까지 싸갖고 올 때면 더욱 비좁아진다. 이 과장이 "구급차보다 좁은 공간에 환자를 실은 카트가 들어오면 바로 앞에 환자의 머리가 위치해 다리를 움직일 공간도 없다"며 "그래서 좁은 데서 하는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거들었다.
체중이 90∼100㎏에 이르는 '무거운' 환자들을 이송할 때도 만만치 않게 힘들다. 김 구조사는 "들것을 이용해 환자를 이송하기 때문에 인계점이 자갈밭이나 잔디밭인 경우 잘 안 끌려 무척 애를 먹는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도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현장에서 제대로 처치한 다음 병원으로 와 시술을 잘 받고 건강하게 퇴원하는 환자들을 볼 때면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낀다"며 웃었다. 그는 지난 여름 등산하다 낙상한 환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봉화 청량산이었습니다. 등산을 하다 낙상해 후두부 부상을 입은 70대 남성이었어요. 산 근처 주차장이 환자를 넘겨받는 인계점이었는데 두개골 골절에 뇌출혈까지 환자상태는 안 좋은데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난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자리에서 기관 내 삽관을 하고 헬기로 이송했습니다."
국내 닥터헬기의 1000번째 출동환자도 안동병원 항공의료팀의 몫이었다. 올해 설 연휴가 시작되던 지난 1월 30일 영주 성누가병원에서 닥터헬기를 요청한 것이다. 이 과장이 기억하는 당시 상황은 이렇다.
"50대 남성이 가슴통증을 호소하며 응급실을 찾았습니다. 의료진이 심전도검사 등을 실시한 결과 급성심근경색으로 의심된다면서 심혈관조영술 및 스텐트 삽입술 등이 가능한 우리 병원에 환자이송을 요청했어요. 헬기로 12분 만에 30㎞ 떨어진 현장에 도착해 응급처치와 함께 헬기에 올랐죠. 환자의 상태를 미리 병원에 알려 응급시술팀을 준비토록 한 덕분에 즉시 스텐트 삽입술을 받을 수 있었어요. 환자는 며칠 후 정상퇴원했습니다."
닥터헬기가 하루에 가장 많이 출동한 것은 지난 6월 18일이었다. 그때도 이 과장과 김 구조사가 일하는 날이었다. 영주 세 차례, 영양과 예천 각각 한 차례 등 모두 다섯 차례나 헬기에 올랐다. 외상성뇌출혈, 패혈증, 경추신경손상, 중증폐손상 등 모두 상태가 중한 환자들이었다. 김 구조사는 "출동했다 돌아오면 헬기 안을 정리하고 물품도 다시 채워놓고 해야 하는데 그날은 잠시 앉을 시간도 없었다"고 소회했다.
영주는 헬기로 왕복 30분, 영양은 38분, 예천은 25분이 걸렸다. 구급차로 오는 것과 비교해 짧게는 10분, 길게는 20분 정도 시간이 단축된 것이다. 이 과장은 "언뜻 봐서 차로 가는 시간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헬기를 타고 현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진료가 시작되기 때문에 실제 시간은 훨씬 단축되는 셈"이라며 "일반적 상황에서는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5∼10분이 응급환자에게는 생과 사를 가르는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헬기 안에서도 치료는 계속된다
언제 응급상황이 발생하지 모르는 터라 점심은 항상 병원 구내식당에서 가져다 먹는다. 출동명령이 떨어지면 5분 안에 헬기가 이륙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사가 얼추 끝났을 때 하늘은 헬기 이륙이 가능할 정도로 개어 있었다.
낮 12시40분께 갑작스레 항공의료팀의 전화벨이 울렸다. 예천의 실버요양원에서 80대 남성이 폐렴·폐결핵이 의심된다며 닥터헬기를 요청했다. 운항관리사가 날씨를 다시 확인한 다음 'OK' 사인을 내자 출동명령이 내려졌다. 이 과장과 김 구조사는 구급차를 타고 즉시 병원 뒤편에 위치한 헬기 계류장으로 달려갔다.
이 과장은 의료진과 일반인 사이에 '응급상황'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고 했다. 그는 "당장 숨이 넘어가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출동을 한다"며 "요양병원에는 전문의가 없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처음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판단했으나 정작 가보니 큰 일(두부 손상)인 경우도 있었다"며 "가급적 출동해서 확인을 해보는 게 최상의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헬기가 예천을 왕복하는 데 들어가는 기름값은 10만원 안팎이다.
낮 12시54분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닥터헬기가 날아올랐다. 잠시 후 헤드폰을 통해 "인계점은 예천공설운동장, 인계점의 날씨는 양호하다"는 운항관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 구조사는 "겨울에는 관리자가 눈을 안 치웠다든지 해서 인계점에 눈이 쌓여 있는 경우가 있다"면서 "프로펠러로 생기는 바람에 눈이 날려 이착륙이 곤란한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안동병원에서 직선거리로 25㎞가량 떨어진 예천공설운동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6분이었다. 12분이 걸렸다. 출발 전 휴대폰 내비게이션으로 측정한 결과에서는 30㎞에 33분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왔었다.
10분 가까이 환자를 기다렸다. '환자가 이미 대기하고 있는'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르다고 했다. 요양원 측에서 구급차가 아닌 일반승합차에 환자를 태워서 왔다. 김 구조사가 환자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 곧바로 헬기로 이동했다. 열이 나고 호흡이 힘든 정도로 다급한 환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김 구조사가 혈압을 재는 사이 이 과장이 활력 징후를 체크하고 산소를 공급해줬다. 맥박이 낮은 것 같아 심전도를 확인했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헬기는 오후 1시26분 안동병원 계류장에 도착, 5분 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들어왔다.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