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는 흔히 영웅주의, 애국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선과 악의 대립구도 속에서 왜소하지만 강직한 영웅이 막강한 테러리스트에 맞서 천신만고 끝에 무고한 시민(미국 시민이면 더욱 그럴듯하다)을 구해내는 무용담이 넘쳐난다. '다이하드' '배트맨' '어벤저스' '스파이더맨' '트리플X' '로보캅' 등 헤아릴 수 없는 액션 흥행작들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세상 사람들은 유아적인, 그러나 묘한 중독성이 있는 할리우드 액션영화에 이미 길들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영웅주의를 열심히 팔아먹던 할리우드 영화사가 정작 자신에 대한 테러 위협에는 너무나 무기력하게 꼬리를 내렸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암살을 다룬 영화 '인터뷰'의 개봉을 취소한 소니픽처스 얘기다. 소니의 굴욕은 할리우드의 굴욕이며 나아가 미국의 굴욕이다. 북한 해커가 소니를 해킹해 미개봉 영화를 유포하고 '인터뷰' 개봉관들에 테러를 하겠다고 해서 소니가 이런 식으로 '항복 선언'을 할 수 있느냐는 비판 여론이 거세다.
미국인들은 용기로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는 프런티어 정신을 숭상한다. 세계 유일의 강대국으로서 사방의 적에게 굴복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9월 9·11 테러 13주년을 맞아 "미국인은 절대로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움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소니의 개봉 취소는 미국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 사건은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영화관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 개봉 취소 외에 대안이 없었다"는 마이클 린턴 소니픽처스 최고경영자의 해명은 묻혀버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소니가 북한의 사이버 반달리즘(문화파괴 행위)에 굴복한 것은 실수"라고 지적했다.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미국은 세계 첫 사이버전쟁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미국 언론과 할리우드 영화인들도 "비겁함의 극치"라며 들고일어났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익명의 단체가 크리스마스에 빵집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해서 빵집이 모두 문 닫지는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궁지에 몰린 소니는 영화 '인터뷰'를 온라인 배급망을 통해 무료 배포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번 사건은 미국이 보기보다 약하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미국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여기저기서 사이버전쟁을 도발할 수도 있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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