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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 첫 태극무공훈장 이명수 예비역 중위 영결식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1.08 17:03

수정 2015.01.08 17:03

별들의 귀감이었던 '일등 상사'
중위 이하 첫 육군장 거행
사병 최초로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고 이명수 중위의 영결식이 김요환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8일 오전 경기 성남 분당서울대병원에서 거행됐다. 김요환 참모총장이 조사를 낭독한 후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박범준 기자
사병 최초로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고 이명수 중위의 영결식이 김요환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8일 오전 경기 성남 분당서울대병원에서 거행됐다. 김요환 참모총장이 조사를 낭독한 후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박범준 기자

6·25전쟁 참전용사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진짜 군인 고 이명수 선생(88)의 영결식이 경기 성남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육군장'으로 성대하고 엄숙하게 거행됐다. 중위 이하 계급에서 육군장이 거행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고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김요환 육군참모총장은 "고인은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는 일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사병 출신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진정한 군인"이라며 "근대사의 산증인이요 군인들의 진정한 귀감이 됐다"고 말했다.


이명수 선생은 사병으로 자원 입대해 만기 제대했으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등상사로 재임용돼 3사단 22연대 3대대 12중대 2소대장 대리 역할을 수행했다. 이명수 상사가 속했던 22연대는 경북 영덕지구에서 북한군 5사단과 대치했다. 수차례 전투 끝에 영덕지구를 탈환했지만 북한군 5사단은 전차(탱크)를 앞세워 강력하고 신속하게 아군 진지를 돌파하려는 전략을 짜고 있었다. 아군에겐 대전차 화기가 없었으므로 탱크는 사실상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도 안에서 해치를 열지 않으면 부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대에서 탱크 파괴 명령이 떨어지자 이명수 상사는 자원해 12명의 특공대를 편성한다. 1950년 7월 28일. 취약시간대인 오후 9시쯤 이 상사가 이끄는 특공대는 인민군 1개 소대를 기습해 사살하고 10여명을 포로로 잡아 암구호(암호) '새'와 '쥐'를 알아냈다.

특공대는 인민군 복장을 하고 전차부대에 접근해 적 전차장들이 자발적으로 해치를 열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해치가 열리자 수류탄 3~4발을 탱크 안에 던져넣어 전차 3대를 완파할 수 있었다. 인민군과 교전 후 도주하는 과정에서 아군 몇 명이 포로로 잡혔으나 특공부대원을 재편성해 포로를 구출해 냈다. 이명수 상사는 목숨을 건 전투 끝에 북한군 5사단의 포항 진출을 약 2주간 지연, 아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 7월 26일. 사병으로는 건국 이래 최초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육군 중위로 제대했지만 그는 '일등상사'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지난 1987년에는 '무공수훈자회'를 만들어 전우들의 처우개선에 힘썼다.


상주 이태영씨는 "아버지는 제대 후 자식들을 키우면서도 과거부터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군인으로 사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ksh@fnnews.com 김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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