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산업이 요구하는 적정 환율 유지 노력 필요.. 상업화 가능한 벤처기술에 과감히 투자하고 키워야"
"분명히 환율은 다른 나라의 흐름에서 이탈돼 있어요. 이미 산업계에선 힘들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정책담당자들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래간만에 가볍게 대화나 나누자는 첫마디는 금세 분명하고 정제된 언어로 바뀌었다. 10여년 전 일이지만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으로 재직할 당시 국제 환투기꾼들과의 일전은 여전히 시장에서 회자되는 사건이다. 외환시장에선 이미 전설이 된 환율주권론자 최중경 동국대 석좌교수(전 청와대 경제수석·지식경제부 장관). 오는 8월 미국에서 귀국을 앞두고 잠시 한국을 찾은 그를 지난 12일 서울 소공로 조선호텔에서 만났다.
―최근 통화전쟁이라 할 정도로 각국이 통화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1080~1100원 선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적절한 수준이라고 보나.
▲구체적인 숫자를 말할 순 없지만 지금보다 높은 수준으로 가야 한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얼마나 다른 나라 통화 흐름과 이탈(Derailed)돼 있는지에 대해선 전문적 판단이 필요하지만 분명히 (적정환율 수준에서) 아래 방향으로 이탈된 건 맞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우리 경쟁 상대국인 일본·중국 등의 통화가 움직이는 방향과 동떨어지면 가격경쟁력 하락이란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지금 이미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산업계에서 말하고 있지 않나. 그러면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각국 정부가 시장원칙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자국 통화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하면 대한민국도 당연히 그에 대응해 (외환)시장에 개입해야 한다. 미국 금리인상과 각국의 통화전쟁이 맞물릴 경우 한국 산업계가 느끼는 고통은 더 커질 수 있다.
―적절한 정책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기 1년 전 1996년부터 산업계에서 도저히 이 환율 가지고선 안 되겠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당시 정책당국자들은 그 목소리를 그렇게 절실하게 듣지 않고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그 대신 내놓은 게 생산성 10% 강화대책이었다. 환율에서 10% 손해본 것을 생산성 10%로 만회하라는 것이었다. 생산성 10% 올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정책의 타임 미스매치(시차 오류)였다. 정책당국이 무식함을 그대로 드러낸 건데, 이런 표현을 쓰는 것도 미안하지만 자성한다는 의미에서…. 경쟁국이 5% 생산성 증가를 한다면 우리는 15%를 해야 했다. 정책당국의 무식함을 그대로 드러낸, 두고두고 타산지석으로 삼고 반성해야 할 정책이었다. 그런 식의 사고에 빠지면 안 된다.
―젊은 외환시장 전문가 중엔 '최중경라인'(1140원선 방어전략)의 상황을 잘 모르면서 최중경라인을 고유명사처럼 쓰더라. 사실 '최중경'이란 이름은 '외환시장의 전설'이 됐다.(웃음)
▲나도 몰랐는데 시장에서 1140원선을 최중경라인이라고 하더라.(웃음) 노무현정부인 2003~2004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신흥국으로 (선진국) 자본이 대거 유입돼 필요 이상으로 원화 등 신흥국 통화들이 절상됐다. 그때 판단은 달러당 1100원 선이 무너지면 바로 1000원 선도 무너질 거라고 봤다. 1차 방어선을 1140원에 친 거다. 서울을 지키려면 서울 위쪽에 방어선을 쳐야 하듯이. 당시 제2외환보유액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파생시장에 들어갔는데 국회에서 비난이 심했다. 결국엔 반은 공무원을 그만두다시피 하면서 월드뱅크로 떠났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다. 산업을 죽이면서 국가가 있을 수 있나. 산업이 요구하는 적정 수준의 환율을 지키려는 노력은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2012년 출간한 '청개구리 성공신화'에서 지식경제, 곧 다른말로는 창조경제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요즘 창조경제 한다고 판교에 벤처밸리를 조성하는데.
▲연구개발(R&D)이란 게 단지가 없으면 못하는 건가. 단지 조성한다고 신기술이 당장 나오는가. 전시행정으로 가선 안 된다. 그건 분명히 낭비다. 단지 조성할 돈이 있으면 상업화해야 할 벤처기술에 눈 딱 감고 100억원, 200억원 지원해주는 그런 과감함이 필요한 게 아닌가. 기존에 상업화 길목에서 좌초된 기술부터 '재고조사'하는 게 급선무다. 본질과 다르게 기존 정책과 차별화한다면 소위 '역선택'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지금 정책당국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후배 공무원들에겐 소신을 갖고 일했던 마지막 세대로 불린다.
▲국회 권력이 정부를 압도하는 상황이 됐다. 정책관료들은 무엇이 옳은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옳다고 하는 걸 끝까지 주장하고. 국회와 국민을 상대로 설득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안 되면 장렬히 전사해야 하는데 어제는 A가 옳다고 했다가 오늘은 B가 옳다고 하면 국민 입장에선 도대체 전문관료제도를 왜 유지해야 하는지 회의가 생기지 않겠나. 어떻게 전문적인 판단이 하루 만에 바뀌는가.
―연말정산 사태를 말하는 건가.
▲구체적인 예를 들진 않겠다. 나는 세제전문가가 아니다. 국민 입장에선 내 비싼 세금을 내면서 도대체 왜 저 비대한 관료집단을 유지해야 하는지 회의가 생기지 않겠는가. 정치권 얘기에 왔다갔다 하면 전문행정관료 제도란 의미가 없어지는 거다.
―최근 정부의 정책메시지 관리가 잘 안 된다는 지적이 있다.
▲전문성이 있는 부분은 펜대를 쥔 사무관, 실무자들에게 위임이 돼서 그들의 목소리가 커져야 하는데 최근에 와서 그게 안 되는 것 같다. 그 목소리를 듣고 아래위로 상하가 모여 토론을 통해 착착 움직여야 정책의 세밀함(디테일)을 유지하고, 기술적 정합성을 유지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메시지가 죽든지, 조금씩 다른 버전 여러 개가 돌아다니는 거다. 청와대 경제수석이 직접 브리핑에 나서는 것도 기재부 부총리와 뉘앙스가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낼 소지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경기고, 서울대 경영학과 △행정고시 22회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 국장 △기획재정부 1차관 △주필리핀 대사 △청와대 경제수석 △지식경제부 장관 △동국대 석좌교수(현) △미국 해리티지재단 객원연구위원(현) 사진=박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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