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이강백이 쓴 '여우인간' 책임 회피 일삼는 개인과 사회 조롱
따뜻한 봄, 따끔한 연극 두편이 관객들과 만난다. 연극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과 '여우인간'(27일부터 4월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이다. 두 연극 모두 미국산 소고기 개방으로인한 한우 파동, 지난해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건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B급 코드'의 유치함과 코믹한 우화로 각각 포장했지만 부조리한 현실을 향한 날카로운 발톱은 숨기지 못한다.
"이 작품은 무협액션환타지 장르여야 한다고 했잖아. 너무 정치색이 세. 그런거 관객들은 좋아하지 않아." "저도 몇번을 말해요. 동시대적 문제의식이 없는 작품은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한다!"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에서 공연감독 역할을 맡은 배우와 작가 역할을 맡은 배우의 논쟁이다. 당수(唐手)의 고수에 의해 전국적으로 소뿔이 잘려나가는 황당한 사건을 다룬 연극을 연습하는 과정에서다. 결국 공연감독의 뜻대로 연극은 듣도보도 못한 무술, 만화영화같은 캐릭터, 오글거리는 대사들이 뒤섞여 속절없이 웃긴다. 하지만 이는 허구와 실제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이 연극의 허허실실(虛虛實實). 마냥 웃을 수 없다. 유독 한우만 피해를 보는 설정이라든가, 이로 인해 분노하는 민심을 잡기 위해 진실을 덮으려는 공권력의 모습은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극중 공연감독은 시종일관 "재미가 주제다" "아무런 생각없이 머리를 텅 비워놓고 무방하다"며 안심시키고는 과격한 액션, 지나치게 발랄한 '뽕짝' 사운드와 함께 '극중극'을 넘어 '극중극중극'으로 넘어가는 3중 구조로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하지만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듯한 이 모든 장치들에 휘둘리다 보면 극장을 나설 때 모든 걸 이해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제대로된 B급 코드는 배우들의 A급 연기로 완성됐다. 열혈 수사관, 색스러운 경찰관, 순정파 소녀 등 개성 뚜렷한 캐릭터들이 펄떡거린다. 4인조 라이브 밴드의 장르 불문 흥겨운 연주도 힘을 보탠다. 오는 29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전석 3만원. (02)758-2150
"지난해 세월호 사건, 잇따른 싱크홀 사건도 예전부터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게 문제죠. 무엇에 홀린 것처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 보면서 깊은 슬픔과 좌절감을 느꼈어요. 이런 절박한 감정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습니다."
한국 현대 희곡의 거장이자 알레고리의 대가로 불리는 이강백 극작가가 '여우인간'을 쓰게 된 이유다. 1971년 등단 이후 줄곧 한국사회의 '오늘'을 말해온 그답게 이번에도 광우병 촛불 시위가 있었던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의 한국 현대사의 일그러진 일면을 꼬집되 직접적인 비판 대신 돌려 말하는 우화 형식을 취한다. 연극은 스스로 꼬리를 자르고 인간이 된 여우 4마리가 서울에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정보요원, 시민단체 대표 비서, 오토바이 소매치기, 비정규직 청소부가 돼 살아가는 여우들과 이들을 박해하는 인간들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극중 여우 사냥꾼들은 교활한 여우들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굳게 믿는다. 다른 인간들도 사고만 났다 하면 여우에게 홀린 탓이라며 핑계를 댄다. 책임을 돌리고 반성하지 않는 개인, 우리 정치·사회의 모습이다. 일반적인 기승전결 구조의 연극과 달리 옴니버스 구성으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퍼즐처럼 끼워맞춰져 결국에 하나로 만난다. 놀이, 영상, 노래 등 다양한 연극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웃고 즐기다 문득 깨닫는 현실은 혹독한 질타보다 더 매섭다. 오는 27일부터 4월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 2만~5만원. (02)399-1000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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