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5평) 규모의 아담한 연구실은 상상했던 과학자의 일터 그대로였다. 과학자의 책상 위에는 각종 연구서적과 메모지들이 수북했다. 어지럽지만 나름의 질서를 갖춘 듯이 보였다. 한쪽 벽면을 장식한 대형 칠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공식들로 빼곡했다. 마치 지구와 멀리 떨어진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착각마저 들었다. 물리학자인 50대 중반의 과학자도 자신의 연구실을 닮았는지 정형화된 모습이나 권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소탈하지만 과학적 열정이 뿜어져 나왔다.
최근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KAIST 서울캠퍼스 내 고등과학원에서 만난 이기명 교수(56)의 첫인상은 그랬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가 언제쯤 과학계에서 노벨상을 탈 수 있을지를 묻자 손사래를 쳤다. 그는 "과학은 '게임'이다. 우리 사회에 새로운 것을 늘 추구하는 게임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일류사회가 될 수 있고, 그런 사회적 풍토가 만들어지면 노벨상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며 "결국 우리 사회가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하려는 인재들이 많아야 기초과학 경쟁력도 올라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작년에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과 함께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수상했다. 그는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진동하는 끈'으로 보는 '초끈이론' 전문가로 이 분야의 난제를 푸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교수에게 초끈이론의 과학적 의미와 우리나라 기초과학계의 현주소, 노벨상에 대한 견해 등에 대해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연구분야인 '초끈이론'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연구로 알고 있다. 독자들을 위해 쉽게 설명해달라.
▲초끈이론은 20세기 초반에 발견된 물리학의 2개의 기둥인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중력이론인 일반상대론의 통합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우주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는 일반 상대론과 입자물리학이 어느 정도 충분한 이론적인 바탕을 준다. 그러나 빅뱅 우주론에서의 우주의 초기는 매우 짧은 시간에 매우 작은 공간에서 매우 높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이러한 우주 초기 조건은 일반 상대론을 뛰어넘은 양자·중력적인 이론이 필요하다. 이론적으로 일관성을 갖고있는 양자중력이론인 초끈이론으로 초기 우주를 연구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1을 0으로 나누는 건 수학적인 부조리다. 보통은 계산을 포기하는 게 가장 쉽지만 과학자는 어떻게든 계속 가보는 거다. 그런 논리에서 우연히 자연을 구성하는 게 소입자가 아니라 끈이라고 가정해 보면 무한대를 없앴을 수 있다는 것이 초끈이론의 기초다. 결국 우주의 구성은 입자가 아닌 바이올린 현처럼 탄력성이 있는 끈으로 구성돼 있고, 끈들이 움직이면서 다양한 형태를 이룬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5년 새 상당한 진보가 있었던 초끈이론의 핵심인 M2면체와 M5면체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한국 과학자들이 기여했다.
―한국의 기초과학이 뒤처졌다고 지적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우선 과학의 발전에 근본인 '상상에 의한 문제 발견과 해결'의 경험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은 천재적 영감이 아닌 끊임없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이론과 실험적으로 다양한 방향에서 애를 써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영감도 떠오르고 갑자기 새로운 방향이 보이는 것이다. 서양은 300~400년간 이런 사고논리를 추구하면서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또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연구 인프라도 아직 부족하다. 연구시간과 연구비를 충분히 지원하는 교육기관이나 기업의 수가 너무 적다. 이와 함께 기초과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연구가들이 대부분 이공계를 떠나 사회의 전 분야에서 기여를 해야 한다. 해외 선진국은 과학자의 20% 정도만 과학계에 남고, 나머지는 사회에 진출한다. 네덜란드의 경우도 초끈이론자가 많은데 교수들은 거의 없다. 과학자들이 사회적 리더는 아니지만 국민들이 문제 해결 역량을 높이도록 적극적으로 사회에 동참해 도와야 한다. 아울러 사회적 인식 변화도 필요하다. 한 국가의 창조적 역량을 키우는 건 과학의 발전만큼 쉬운 방법이 없다. 암기식 사고체계가 아닌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리는 이해와 상상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해법과 응용을 찾아가는 과정은 기초과학 발전뿐만 아니고 사회 전반에 많은 혜택을 줄 수 있다.
―우리나라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과 시기는 어떻게 보는지.
▲기초과학물리학상 등 노벨상보다 훨씬 많은 상금의 과학상들이 최근 제정됐다. 그런 면에서 노벨상의 성격도 최근 바뀌는 것 같다. 얼마나 새로운 걸 가지고 게임을 많이 하느냐가 과학경쟁력의 근본이다. 이런 게 쌓이면 경험도 성과도 뒤따른다. 우리 국민들의 세금으로 마음대로 과학적 게임을 추구할 수 있는 연구환경이 마련됐다. 그런 목적에서 고등과학원도 만든 것이다. 우리가 계속 2류로만 살 수는 없다. 일류 게임도 해보고, 그런 과정을 통해 세상을 보는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면 노벨상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내 과학계는 대부분 응용과학을 중심으로 학자들을 임용하는 경향이 있다. 순수 기초과학에 좀 더 많은 연구직이 생겨야 한다.
―노벨상을 위해 정부와 우리 사회가 기초과학을 위해 추구해야 할 전략이 있다면.
▲노벨상을 목표로 한다는 전제부터가 우리 정부가 잘못된 과학정책을 만들게 하는 오류에 빠지도록 한다. 무엇보다도 심오하고 영향력 있는 연구를 목표로 하고 좀 더 많은 연구가들이 활동하도록 환경을 만드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또한 야심 있는 젊은 학생들이 기초과학에 참여하고 사회로 회귀할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기초과학의 깊이와 크기를 키우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후배 기초과학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자기자신의 열망과 관점에 충실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가족과 친구, 상사의 눈치를 보지 말고 내면의 목소리를 추구해도 갈길이 멀다. 자신이 원하고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부터 찾아야 한다. 그리고 비판하고, 관조하면서 자신의 주체가 되는 게 첫걸음이다. 나는 '내가 잘해야 할 이유는 잘 모르지만, 잘 못할 것 같다는 이유는 변명뿐인 것 같다'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게 많은 도움이 됐다. 모든 문제를 쉽다고 접근하면 답도 쉬워진다. 그리고, 답을 쉽게 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노벨상이 한국 과학계에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
▲물론 노벨상을 수상하면 매우 축하할 사건이다. 그러나 수많은 오해와 실수의 시작일 수도 있다. 차분하고 현명하게 다양한 분야를 추구해야 한다. 노벨상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본다. 마치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격'이다. 연구가들은 매일같이 새로운 관점으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금속활자나 한글 등 과거 우수한 발명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하지만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별로 없다.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도 여러 가지 것들을 애써보았고, 몇 가지 주요한 발견들을 누구보다도 먼저 했다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정명진 팀장 최갑천 이설영 조윤주 김미희 박세인 고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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