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1.4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준 아군은 평택~속초 축선에 집결해 전열을 정비한 뒤 반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태기산 전투의 승전을 비롯해 아군의 반격은 성공적이었고 아군은 적을 인제부근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던 적의 공세를 꺽고 반격과 북진을 재개하던 때였던 만큼 피아간의 전투는 말 그대로 혈투였다. 전사(戰史)에 따르면 당시 피아간의 전사자 수는 1200명~3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시산이 수습되지 못했고 산하에 그대로 방치된 채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끝난 지 62년만에 전사자들을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이곳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유격보다 힘든 작전"
발굴 작전이 진행 중인 곳은 차량이 닿을 수 없는 해발 900m 이상 고지였다. 도로가 발달하고 차량성능이 좋아져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해발 650m이상부터는 걸어서 갈수 밖에 없는 곳이다.
발굴지역은 장미산 정상부근으로 가장 가까운 도로에서도 한 시간 이상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다. 경사는 40도가 넘을 정도로 급했고 가슴까지 자란 수풀과 곳곳에 넘어진 통나무, 이끼가 낀 바위로 인해 상당히 위험했다.
이곳에서 발굴감식단 장병들은 벌써 2주째 매일 오전9시부터 오후5시까지 매일 8시간 동안 유해발굴작전을 벌이고 있다. 국방부 소속의 전문 감식단 장병과 현지에서 지원나온 육군 36사단 평창대대 장병 등 200여명은 매일 같이 이곳을 오르내리고 있다. 9시부터 작전을 시작하려면 적어도 7시에는 부대를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장병들의 설명이다.
발굴지역에 도착하면 하루 종일 제초작업과 굴토작업의 연속이다. 한쪽에서는 평창대대 장병들이 낫으로 풀을 베고 다른 부대원들이 호미로 흙을 긁어 내며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마스크와 장갑으로 중무장한 전문 발굴감식단 장병들이 전지가위와 붓으로 조심스럽게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평창대대 장병들이 호미로 흙을 긁어내다 유해나 유품이 발견되면 국방부 소속 전문 발굴감식단으로 임무가 이관되는 방식이다.
손이 부르트고 굳은 살이 박히는 것은 당연하고 부상을 입는 장병도 적지 않다. 너무도 고된 작업이다 보니 유해발굴작전에 투입된 장병들에게는 유격훈련이 면제된다.
하지만 장병들은 '차라리 유격이 낫다'라고 입을 모은다. 유격보다 힘들지만 선배 전우들을 가족의 품에 돌려보낸다는 자긍심과 사명감에 유격보다 힘든 발굴작전을 거뜬히 이겨낸다는 것이다.
발굴감식단 소속 황재하 병장(24)은 "유해는 작은 충격에도 바스라지기 쉬워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특히 뿌리나 나뭇가지가 유해에 파고드는 경우도 많다"며 "매일같이 산을 오르고 내리는게 힘들긴 하지만 유해 1구라도 발견될때면 그 뿌듯함을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했다.
■ 적군과 뒤엉킨 채 60년
지난 18일 파이낸셜뉴스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부분 유해 3구가 발견된 상태였다. 이 가운데 2구는 아군으로 보이고 1구는 적군으로 보인다고 발굴감식단 관계자는 밝혔다.
적군 유해로 추정되는 유골은 미군으로 추정되는 유골과 함께 발견됐다. 발굴단 관계자의 말을 빌자면 '두 구의 유해가 뒤엉긴 채' 였다.
가장 먼저 발견된 것은 밑창만 남은 전투화와 그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발가락뼈였다. 유골을 처음 발견한 육군 제36보병사단 평창대대 소속 전호정 일병(21)은 "나뭇가지와 모양이 비슷해 구별하기 어려웠지만 단면에 구멍이 뚫려 있는 점이 이상해 감식병을 불러 확인하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발가락뼈를 중심으로 발굴지를 확대한 결과 주변에서 종아리뼈와 두개골, 치아가 붙어있는 아래턱뼈가 발견됐다. 발굴단 관계자에 따르면 치아는 전사자의 유전자(DNA)를 감식할 수 있는 주요 단서로 분류된다.
발굴감식단 배대장 팀장(상사·38)은 "전투화 밑창이 물결무늬일 경우 아군 군화"라면서 "사이즈가 약 300㎜를 넘는 것으로 보이는 만큼 미군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배 팀장은 발굴 당시 북한군 것으로 보이는 전투화 밑창도 함께 발견됐다면서 종류가 다른 두 개의 전투화 밑창이 나왔고 왼쪽으로 추정되는 발뒷꿈치뼈도 2개가 발견된 점을 들어 아마도 '미군 시신과 적군 시신이 뒤엉킨 채 60년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라고 추정했다.
그는 "6.25 당시 피아 구분없이 전사자들의 군화를 벗겨서 신기도 해 100% 피아 식별은 어렵다"라며 "인식표(군번줄)가 있다면 좋겠지만, 인식표는 6·25 발발 1년여 뒤부터 보급됐기 때문에 아군 인식표를 찾는다면 무척 행운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태극기로 감싸 봉안
발굴된 유골은 뼈 한점 한점을 따로 한지에 싸서 수습한 다음 작은 상자에 넣어 인근 부대로 운구된다. 원칙적으로 한 구를 하나의 상자에 넣도록 돼 있지만 확인이 어려울 때에는 같은 곳에서 발견된 유골을 한 상자에 함께 넣기도 한다.
유골을 담는 상자는 오동나무로 제작된 최상급 제품으로 국군인 경우 태극기로 감싼 뒤 간단한 제례의식을 치른 뒤 운구한다. 외국군의 경우 그 나라 국기나 UN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아군 유해가 이송될 때에는 발굴에 참가한 장병 모두가 도열해 운구하고 발굴에 참가한 현지부대 지휘관(영관급 이상)이 운구절차를 직접 지휘한다.
한편 적군으로 식별된 유해의 경우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군묘지로 운구한다. 발굴감식단 관계자는 "적군으로 추정될 때도 정중히 수습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파주 적군묘지에 묻힌 유해 가운데 중공군 유해 200여구는 지난 해 중국으로 송환됐다. jyyoun@fnnews.com 윤지영 기자 한영준 원희영 안태호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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