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에 이야기를 입히다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이수자 현재의 관객과 호흡하고 싶어 단순한 전수 아닌 '창작' 이어가 1990년대부터 130개국 돌며 공연 서울올림픽 개막공연 안무 맡기도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한국 춤 정상까지 올랐었지만 명무라는 말은 관객이 붙여주는 것 이성·지성·감성 공존하는 작품 좇아 장독대도 안만들고 장맛 알리겠나 전통 담을 '전용무대' 늘어나야
한국 전통춤을 보전하는 대가들은 많다. 고된 수련으로 춤을 체화해 무형문화재가 된 명무들이다. 이들을 통해 우리 춤의 원형이 이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크다. 국수호(67)도 이 가운데 하나다.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이수자인 그는 '승무 귀신'으로 통한다. 하지만 무형문화재라는 그릇은 그를 담아내기엔 너무 작다. 그는 이수한 전통 춤을 다시 후대에 가르치는 전수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전통이 동 시대의 관객과 호흡할 수 있도록 생명력을 불어넣는 창작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국의 몸짓을 세계에 알린 선구자다.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아시아는 물론 유럽, 중동 등 130개국을 돌며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한국의 춤을 공연했다. 지난 3일 서울 대치동 국수호디딤무용단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 전통 춤을 추는 무용가들은 많다. 국수호의 차별성은.
▲예부터 흘러 내려온 춤들을 배우긴 했지만 이를 통해 앞으로 한국의 춤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를 생각한다. 현재 보전되고 있는 춤들은 대부분 조선 왕조부터 내려온 기방의 춤을 무대화한 것들이다. 삼국시대와 그 이전 찬란했던 우리의 춤을 현대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30년 전부터 몰두하고 있는 작업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과거 우리 전통 춤의 기록을 찾아내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춤의 유산으로 남겨놓고 싶다는 생각이다. 내가 창작한 백제의 춤이 수백년 후에 보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면 무형문화재가 될 수도 있지 않겠나.
―어릴 적부터 그런 꿈을 꾸었나.
▲무용을 배우긴 했지만 평생 하겠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직업 무용수가 되고부터는 한국 최고의 무용가를 꿈꿨다. 다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춤의 형식을 이루고 싶었다. 사회에 묻어가는 무용가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국수호가 춤을 추게 된 건 "지금 생각해 보니 운명"이었다. 춤에 뜻이 있어 시작한 게 아니라 자연히 익히게 됐다. 고향인 전북 완주군 비봉면에서 마을 굿을 전담하던 무당 전주댁의 몸짓이 눈에 깊이 박혔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두세살 때였어요. 갑동이로 불리던 아저씨가 장구와 꽹과리를 치고, 전주댁이 방방 뛰면 방고래가 푹 꺼질 정도였어요. 자연스럽게 내 삶에 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거죠."
타고난 끼도 있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하고서는 응원단장으로 사람들 앞에 섰고 누가 아리랑, 도라지타령이라도 부르면 덩실덩실 춤을 췄다. 어른들은 물론 동년배들에게도 인기 최고였다. 중학교 3년 동안은 밴드에서 큰북을 쳤다. 서양음악의 박자와 리듬, 기보법을 깨우쳤고 관객이 있는 공연 무대를 처음 경험하게 됐다. 전주 토지개량조합장이셨던 아버지의 권유로 농고에 진학하고서도 전통예술과의 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농악반에서 장구를 배웠는데 "얻어 맞아가며" 모질게 배웠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 수차례 입상도 했다.
―언제 정식으로 춤을 추겠다고 결심했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측량회사에 취직하라는데 그때 처음으로 무용을 전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열여섯살 때 (전라삼현승무 명인) 정형인 선생께 승무, 검무, 남무를 배웠다. 이걸 기반으로 서라벌예대 무용과 시험을 봤는데 덜컥 붙었다.
―천재였나.
▲어느 정도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집중력과 집념이 더 컸다. 어쩌다보니 춤의 세계로 흘러왔지만 적당히 하지는 않았다. '적당히'가 없는 성격이기도 하다. 북이든 장구든 시작하면 뿌리를 뽑았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 남자가 춤을 춘다니,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
▲못 말리는 아들이었다. 오히려 부모님이 내 뜻을 따라주셨다. 금전적 지원을 해주신 건 아니다. 대학 때부터는 스스로 벌어서 먹고 장학금 받으며 공부했다. 한국무용가인 박금슬 선생님 무용연구소 방바닥에서 먹고 자며 바라 승무를 배웠다.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직후 입대해서도 국악대로 활동하며 장구를 쳤다. 제대한 이듬해 1973년 국립무용단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지원해 특채로 뽑혔다. 남자 직업무용수 1호였다. 전문 무용수가 됐지만 배움이 덜했다고 생각했다. 김천흥, 한영숙, 은방초 등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이던 당대 최고 무용가들에게 사사하면서 중앙대 연극영화과 3학년으로 편입해 연극 이론을 배웠다. 이후 민속학으로 같은 대학에서 석사과정도 밟았다. 27세에 서울예대 교수직에 올랐고 중앙대에서 26년간 가르쳤다.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스승은.
▲국립무용단 단원 시절 단장이셨던 송범 선생님이 제일 큰 스승이다. 무대에 맞는 춤의 형식을 가르쳐 주셨다. 춤의 뼈대는 박금슬 선생님, 살은 이매방·정형인 선생님이 붙여주셨다. 하나의 이론, 한 분의 스승으로는 나만의 또 다른 무언가를 성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연극과 민속학을 배웠나.
▲모두 무용을 위해서였다. 송범 선생님이 국립무용단장으로 있을 당시 무용에 극을 도입했다. 사실 무용이라는 게 말 없는 연기 아닌가. 무용극의 시대가 올 거라고 봤다. 민속학을 한 것은 한국 민속예술의 무궁무진한 소재들이 곧 춤의 소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 춤의 샘이 마르지 않는 원동력이다.
국수호는 한국 무용극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립무용단원 당시 무용극 '왕자호동' '원효대사' 등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섰고 1980년대부터는 직접 무용극을 만들며 장르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무용뿐만 아니라 마당극, 창극부터 연극, 뮤지컬, 오페라까지 모든 공연예술 장르를 불문했다. 1987년 디딤무용단을 창단하고부터 매년 정기공연을 통해 그가 추구하는 '스토리텔링이 있는 춤'의 날개를 활짝 폈다. 이듬해는 88 서울올림픽 개막 공연의 안무를 맡으며 무용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달렸다. "88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풍족해졌어요. 최정상이었죠. 5형제의 장남이었는데 동생들 다 장가 보내고 자립하게 해줬어요. 나라의 발전과 함께 춤이 쓰이는 데도 많아지던 때였는데 실력도 쌓인 참이었어요.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죠."
그의 인생이 상승곡선만 그린 것은 아니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국립무용단장직에서 내려와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한국 춤의 대표주자로서 그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없었다. 2002년 월드컵 개막식 총괄안무를 맡으며 재기했다. 그는 "끊임없이 계발했더니 기회가 왔고 그걸 잡았다"고 회고했다.
―정상에 있던 기분은.
▲더 올라갈 자리가 없다고 느꼈을 때 잘 늙을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창작자로서 사회에 필요한 춤을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삼았다. 무용수로서는 일흔에 명무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3년 남았다. 이미 명무 아닌가.
▲그걸 왜 나에게 묻나. 명무의 호칭은 보는 사람들이 붙여주는 거다.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있는 춤만 추지 않고 창작을 계속하는 이유다.
―창작의 철학이 있나.
▲이성, 지성, 감성이 공존하는 춤을 만들려고 한다. 감성만 있는 춤은 보고 즐기는 데서 끝난다. 시대를 반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역사에 기록되지는 못한다. 한국인의 유전자(DNA)가 샘솟는 무대를 보여주려고 한다.
―창작의 영감은 어디서 받나.
▲50년간 전 세계를 돌며 모은 자료가 트럭 10대 분량이다. 창작의 인문학적 토대다. 또 역사의 현장에 직접 가서 세월의 흔적과 감성을 저장한다. 한 번만 가지 않는다. 일본에 있는 미마지의 토무대는 수도 없이 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속의 미마지를 전부 느껴봐야 했다.
미마지(味摩之)는 서기 612년 백제 무왕의 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무용가다. 아스카(飛鳥) 지역 사쿠라이(櫻井) 언덕에 토무대(土舞臺)를 만들어 놓고 일본 귀족 자제들에게 춤과 기악을 가르쳤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와 '교훈초'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국수호는 40년간 일본을 오가며 한·일 춤문화의 원형을 탐구해온 끝에 일본의 궁중무용 부가쿠(舞樂)가 미마지의 춤에서 발전했다는 결론에 닿았다. 올해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아 그 춤을 '미마지 무악'으로 재현해 지난 6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올렸다. 찬란했던 우리 춤의 과거가 현재로 되살아났다. 이미 그는 '고구려' '그 새벽의 땅'(백제) '천마총의 비밀'(신라) '가야'와 같은 역사 춤극으로 삼국시대 춤을 재현했다. 지난 5월 고조선 건국 이전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한 '신시'는 그 완결판이었다.
국수호는 한국 춤의 미래도 제시한다. 지난해에 춤 인생 50년을 돌아보며 선보인 '춤의 귀환'이 대표적이다. 핵심은 '한국 춤 전용무대'였다. 무대 디자이너인 박동우 중앙대 교수와 함께 일본 가부키와 노, 분락구, 중국의 경극 무대 등 각국의 춤 전용 무대를 찾아다니며 연구한 결과물이었다.
"우리나라만 춤 무대가 없어요. 서양식 프로시니엄 스테이지(액자무대)만 있을 뿐이죠. 발레나 현대무용과는 움직임의 방법 자체가 다른데 같은 무대에 오른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가족이 함께 지낼 집이 필요한 것과 같아요. 춤의 집이 없다면 우리 춤은 흩어져버리고 말아요."
춤뿐만 아니라 그는 "10년 내에 창 전용극장, 악 전용극장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했다. "전통을 담을 집도 만들어놓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 것의 세계화를 꿈꾸겠습니까. 장독대도 안 만들고 세계에 장맛을 알린다는 것과 같아요."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있어 춤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문이었다. "그게 질문입니까. 허허. 인생이지 뭐."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67세 △전북 전주 △서라벌예대 무용과 △중앙대 연극영화학 학사 △중앙대 대학원 민속학 석사 △1973년 국립무용단 남자 직업무용수 1호로 입단 △중앙대 무용학과 교수 △국수호 디딤무용단 창단 △88서울올림픽 개막식 안무 총괄 △88서울예술단(현 서울예술단) 예술총감독 △국제극예술협회 무용분과위원회 이사,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국립무용단장 △2002 한·일 월드컵 개막식 안무 총괄 △1989년 국무총리상 올림픽 참가 문화예술인 △1998년 대통령 표창 △2002년 한국춤평론가회 춤비평가상 특별상 △2010년 대한민국무용대상 전국부문 대통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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