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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0) '영원한 광대' 동춘서커스단장 박세환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8.23 17:50

수정 2015.08.23 17:50

"동춘이 없어지면 안된단 생각으로 반세기 홀로 버텨"

평생을 광대로 산 박세환 동춘서커스단장은 "1925년 창립해 올해로 90년이 된 동춘서커스단은 개인사업체가 아니라 범국민적 기업이자 단체"라며 "동춘서커스 100년 역사를 이어가려면 국가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사진=서동일 기자
평생을 광대로 산 박세환 동춘서커스단장은 "1925년 창립해 올해로 90년이 된 동춘서커스단은 개인사업체가 아니라 범국민적 기업이자 단체"라며 "동춘서커스 100년 역사를 이어가려면 국가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사진=서동일 기자


서울 신당동에 위치한 박세환 동춘서커스단장(71)의 자택에 발을 딛자마자 하얗고 조그만 마르티스가 달려와 맹렬히 짖어댔다. 박 단장의 발꿈치에 딱 붙어 아양을 떠는 통에 도무지 인터뷰를 진행할 수 없었다. 박 단장이 한참을 달랜 후에야 녀석은 시무룩해져서 거실 한쪽 제 방으로 돌아갔다. "나를 그렇게 따라. 동물이랑 원래 친해요. 코끼리, 호랑이 할 것 없이. 주인을 알아보거든. 그러고 보니 동물 쇼 안한 지가 십수년 됐네. 내가 녀석들을 아껴도 동물보호법에 저촉된다니 별 수 있나. 나중에는 경제적으로 힘들어서도 못했고. 예전에는 창경원 다음으로 우리가 동물이 많았어요. 동춘 온다고 하면 난리가 났었지." 자연스럽게 동춘서커스단의 90년, 박 단장의 광대인생 52년, 그 모진 풍파의 세월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경주고등학교 1학년이던 세환은 동춘서커스를 처음 보고 '이거다' 싶었다.
악대부에서 트럼펫을 배워 연주를 곧잘했고 노래도 잘해서 대회에 나가 상도 좀 타본 그였다. 매끈하게 잘 생긴 얼굴까지 받쳐주니 가수나 배우를 꿈꿀 만했다. 그런데 마땅히 배울 데가 없었다.

196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집을 나와 동춘서커스단을 찾아갔다. 밀양 박씨 종손은 행불자가 됐다. 그의 할아버지인 박화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학자이며 박씨 종친회 부회장에 성균관대.대구대 등 이사를 역임했고 육당 최남선과는 절친한 관계였다. 뼛속 깊은 유학자, 양반 중에 양반이었다. "내가 우리 집안 돌연변이였어요. 할아버지는 시인이든 화가든 다 '쟁이' 취급 했으니 애초에 말도 못 꺼내고 그냥 가출해버렸지."

노래, 악기 연주, 연기 좀 한다 하면 다 동춘서커스단으로 몰렸다. 1925년 전남 목포에서 창설한 동춘서커스단은 일본 고사쿠라 서커스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박동수가 조선인 30여명을 모아 꾸린 동춘연예단이 시작이었다. 최근 들어서 '아트 서커스'를 지향하며 서커스를 전문화했지만 당시 공연은 신파연극, 노래, 만담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었다. "서커스단이 15개쯤 됐는데 동춘이 최고였어요. 당시에는 연극영화과도 많지 않아서 나 같은 심산으로 찾아오는 젊은 애들이 바글바글했어."

없는 사람처럼 보름을 지내다가 오디션을 봤지만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석달 동안 무대 청소를 하며 동춘의 일류배우였던 남철의 심부름을 했다. 보통 한 곳에서 한 달 공연을 하면 20일이 지나면서부터 관객이 확 준다. 그 틈을 타 신인들의 데뷔 무대가 열렸다. 1년쯤 지났을까.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본격적인 광대 인생의 시작이었다.

―첫 무대의 기억은 어떤가.

▲참담했다. 평생 못 잊는다. 무대에 오르니 머리가 핑 돌더라. 평소에 잘 부르던 '청춘의 꿈'인데 박자를 다 틀렸다. 정신을 못 차리니까 결국 사회자가 노래를 중단시켰다. 하늘은 노랬고 자존심은 제대로 상했다.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했다. 내가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늘 하던 말이 있다. 연습할 때 아무리 잘해봐야 소용없다. 관객을 둔 무대에서 잘해야 진정한 프로다.

―주특기가 노래였나.

▲노래, 트럼펫 연주, 연기, 원맨쇼까지 다 했다. 사실 사회자로 제일 유명했다. 인기가 말도 못했다. 서커스단 내에서는 돈 적게 받고 일인다역을 하니 좋아했다. 박동수 단장이 나를 양아들로 삼았을 정도니까. 밖에서는 철없는 소녀들이 숱하게 따라다녔다.

1960년대 말부터 서커스단 소속 배우들이 하나 둘 방송국으로 떠날 때도 그는 동춘을 지켰다. 배삼룡, 서영춘, 구봉서 같은 당대 최고 코미디언들이 다 동춘 출신이었다. 당시 박 단장에게도 문화방송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결국엔 동춘을 선택했다. "조연급들이 나갔지, 일류들은 못 나갔어요. 동춘 문 닫을까 봐, 양심상. 그리고 방송국은 이제 막 생긴 참이라 동춘의 대우가 더 좋기도 했어."

하지만 금세 전세가 역전됐다. 텔레비전의 출현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치명적이었던 건 1972년 4월 3일 첫 방송을 시작한 TV 드라마 '여로'였다. 새마을운동이 낮 공연 관객들을 막더니 '여로'가 밤 공연 관객까지 집에 주저 앉혔다.

―타격이 얼마나 컸나.

▲'여로'가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악극단, 농악단, 쇼단 할 것 없이 전국의 무대공연 단체가 전멸했다. 관객이란 참 냉정한 집단이다. 당시 무대공연을 한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 국토 좁고 인구도 적은데 봄에는 농번기, 여름에는 혹서와 태풍, 가을에 좀 괜찮은가 싶으면 금세 겨울 와서 눈보라 치니까. 지금도 전염병이 돌거나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게 공연시장이지 않나.

―방송국으로 가서 스타 된 사람들 보면 질투 나지 않았나.

▲왜 안 났겠나. 내가 주연할 때 배삼룡이 마당쇠를 했는데. 동춘은 춥고 배고픈데 잘된 사람들 보면 속으로 배가 아팠다.

동춘이 주춤하면서 박 단장의 앞길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손주가 '광대짓'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결국 1975년 동춘을 떠나 부산 대아극장에서 선전부장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생필품 도매상을 하며 돈을 모았다. 1978년 9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기 전까지였다. 천막극장이 무너진 여파로 동춘서커스단이 매물로 나왔다는 얘기에 그는 있는 돈을 다 털어 동춘을 샀다. 500만원. 집 세 채는 거뜬히 살 돈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생각은, 동춘이 없어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동춘이 없어지면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한 장르가 사라지는 거니까."

박 단장이 경영에 나서면서 다시 동춘에 활기가 돌았다. 연세대 경영학과에 편입해 1982년 졸업장을 땄다. 동춘이라는 기업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더 배워야 했다. 세무, 노무, 회계는 물론 해외 공연계 인사들과 대화를 위해 영어도 공부했다. 디자인도 공부하고 영상기술도 교양수업으로 배웠다. 현금을 궤짝으로 쌓을 만큼 돈을 벌었다. 버는 족족 새로운 공연장비를 사고 더 좋은 천막을 짓고 공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썼다.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0) '영원한 광대' 동춘서커스단장 박세환


―언제 제일 힘들었나.

▲2003년 9월 10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전남 광양에서 추석맞이 공연을 할 참이었는데 태풍 매미가 와서 20분 만에 극장을 휩쓸고 갔다. 가설극장은 재해 보상도 안 된다. 진주에서 겨우 다시 시작했는데 2008년에는 사기를 당했다. 부천에 상설극장을 지으려고 민자 유치를 했던 게 문제를 일으켰다. 극장 신경 쓰느라 서커스단을 방치했더니 양쪽으로 적자가 났다.

―그래서 2009년에 해체 선언을 했나.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는데 그해 신종플루가 최후의 한 방이었다. 7월부터 5개월째 관객이 없었다. 그해 11월 15일, 동춘서커스단 홈페이지에 문 닫는다고 글을 올렸다.

그러자 온 국민이 야단이 났다. 인터넷 토론방에 '4대 강 하지 말고 전통 살려라' 등 비판 글부터 '동춘 문 닫으면 유인촌을 무인촌으로 만들겠다'는 당시 문화부 장관을 향한 애교 있는 협박까지 여론이 거셌다. 다음 아고라에선 모금운동까지 벌이고 있던 차였다. 박 단장은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기로 했다. 담보 잡힌 집을 짊어지고 김포 실내체육관을 한 달 통 크게 빌렸다. '마지막 파티'라는 생각으로 조명, 음향, 프로그램 모두 최고로 준비했다. 눈이 무릎까지 쌓이던 12월 20일 오후 2시 첫 공연이 시작하기 20분 전, 관객들이 끝을 모르고 줄을 섰다. 그해 동춘서커스단은 예비 사회적기업으로도 선정돼 인건비와 사업개발비를 지원받았고 2013년에 사회적기업으로 정식 인증을 받았다.

―그때 기분이 어땠나.

▲눈물이 났다. 기사회생이었다. 그 공연으로 8억 빚을 다 갚았다. 우리나라 국민들 정말 대단하고 또 고맙다. 그때부터 동춘서커스단은 내 개인사업체가 아니라 범국민적 단체가 됐다. 공연 오프닝 멘트 할 때도 말한다. 여러분이 낸 티켓 값은 동춘서커스단이 90년을 넘어 100년 역사를 이어가는 후원금이 될 것이라고.

박 단장은 하지만 100년 역사를 이어가는 것은 관객 동원의 차원을 넘어선다고 말했다. 서커스 전문인력, 이들을 양성할 기관, 자금이 마련돼야 하는데 개인으로서 감당하기엔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태양의 서커스'는 1985년 국가 지원으로 100억원을 받아 1년에 1조원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 돈이면 동춘서커스는 세계 최고가 되고도 남죠."

―왜 서커스에 지원해야 하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이다. 남녀노소, 외국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콘텐츠다. 세계 공연예술 시장의 62%를 차지하는 게 서커스다. 미국, 독일 등 선진국에서 관광산업에 가장 활발히 활용하고 있다. 중국, 일본, 북한에도 전용극장이 있다. 동춘서커스가 잘 살려고 지원하라는 게 아니다. 서커스의 명맥을 이어가야 할 것 아닌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서커스 상설극장과 아카데미다. 이미 머릿속에 계획이 다 세워져 있다. 내가 가진 서커스 관련 소장품을 전시해 박물관도 꾸밀 것이다. 외국에서는 전문 체조선수들이 선망하는 직장이 서커스단이다. 연봉도 아주 많이 받는다. 우리나라도 그런 분위기가 되도록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국가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지원 못 받아도 어떻게든 만드는 게 꿈이다. 열심히 자금을 마련해 나가고 있다.

박 단장은 이미 1995년부터 서커스 활성화 제안서를 들고 지자체와 정부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서민예술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통하는 것 같다가도 정작 아카데미 계획서, 관광 프로그램을 제출하면 감감무소식이었다.


박 단장은 총알같이 빠른 세월을 안타까워했다. 동춘과 함께한 인생이 어땠냐는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할 일이 굉장히 많다"며 '미래'로 화제를 돌렸다.
하고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가진 노하우로 오십살만 됐어도 훨훨 날아다녔을 텐데. 세계서커스엑스포도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고. 근데 늦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여전히 뛰고 있고, 후계자를 뽑을 계획도 세워놨고. 시간이 자꾸 가니까 마음이 조급해서 그렇지."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박세환 프로필 △1944년생(만 71세) △경상북도 경주 출생 △경주중·고등학교 졸업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중퇴 △1963년 동춘곡예단(현 동춘서커스단) 입단 △1975년 부산극장 선전부 부장 △1978년~현재 제3대 동춘서커스단 단장 △1982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1985년~현재 한국곡예협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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